영화 ‘카트’에 등장하는 중요한 공간 중 하나가 마트 직원들의 탈의실이다. 보일러실 옆에 있다는 그 탈의실은 직원들이 오며 가며 안부를 나누고 이야기하는 공간인 동시에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 직원들이 결의를 다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 속 마트 직원들에게 탈의실은 단지 옷을 갈아입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가 담긴 곳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에게 탈의실이 중요한 공간이 되었을까? 그 이유는 직원들이 근무시간 외에 쉴 마땅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직원이 모여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은 보일러실 옆 판자를 세워 만든 탈의실뿐이었다.


카트를 보다가 문득 지난여름 일했던 백화점이 떠올랐다. 백화점은 고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만큼 직원들의 사정도 나름 괜찮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도 알바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난여름 3개월 동안 경험한 백화점은 그렇지 않았다. 



어두워도 위험해도 옷 갈아입을 수 있잖아?


백화점 식품관에 있는 한 매장에서 일을 시작한 나는 항상 출근 시간보다 일찍 나와 유니폼을 입고 복장 정리를 했다. 직원 탈의실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항상 매장 사무실에서 갈아입었다. 유니폼을 입는 일은 도중에 누가 올까 마음 졸이며 재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점장이 사무실에서 근무를 봐야 한다는 이유로 알바생들한테 '저 옆에서' 갈아입으라고 했다. 저 옆이라고 해서 어딘가 봤더니 공조실이었다. 공조실 문을 열었더니 보이는 건 커다란 기계뿐이었고 조명도 없어 깜깜하기만 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옷을 갈아입으라는 건지 잘 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다시 물어봤지만, 점장은 공조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먼저 들어온 알바생이 직접 핸드폰으로 플래시를 켜주면서 갈아입고 나오라고 말했다. 처음으로 플래시 불빛만 있는 공간에서 혼자 옷을 갈아입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섭기도 하고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점장 일이 바빠도 그렇지 알바생 옷 갈아입는 시간이 몇 분이나 걸린다고 그렇게 껌껌한 곳에서 유니폼을 입으라고 하다니 화가 났다. 그러나 화가 나는 건 나뿐이었다. 다른 알바생들은 으레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조선비즈


밥만 먹을 수 있다면 계단이어도 괜찮지?

백화점 식품관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정신없이 일하다가 사무실에 들를 일이 있어 매장을 빠져나와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마주친 건 계단에 앉아계신 만두집 아줌마였다. 만두집 아줌마는 계단에 앉아 허겁지겁 식사하고 계셨다. 그 넓은 계단에 홀로 앉아 계신 아줌마는 밥을 먹는 다기보다는 밥을 입에 넣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순간 멍했지만 차마 지켜볼 수가 없어 못 본 척하고 사무실로 재빨리 들어갔다. 

왜 계단에 불편하게 앉아 점심을 먹어야만 했을까?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엄연한 휴식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밥을 맘 편히 먹지도 맛있게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종종 계단에서 식사하는 식품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만두집 아줌마부터 일식집 청년까지 고객에게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품관 직원들은 뒤에서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던 것이다. 


직원 할인 해줄게, 대신 좀 어지럽혀도 되겠니?

한편, 백화점 지하 2층은 직원 전용 공간으로 직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식당과 화장실이 있었다. 또한, 물류 창고도 있었다. 그 날 들어온 생선과 채소부터 옷과 신발, 화장품까지 모든 백화점 상품이 판매되기 전 거치는 곳이 지하 2층의 직원 전용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지하 2층은 백화점 개장 시간 전뿐만 아니라 영업시간에도 직원들과 수많은 물건으로 혼잡했다. 엘리베이터로 상품을 운반하려는 사람부터 식당,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까지 말 그대로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안 그래도 복잡한 그 지하 2층에 향수를 파는 사람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그날 판매할 향수를 쌓아놓은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직원들을 상대로 향수를 팔고 있었다. 특별히 백화점직원 할인으로 싸게 판다는 말이 시끄러운 지하 2층을 울리고 있었다. 아니, 쌓여있는 물건들만 해도 정신없는 곳에서 판매라니? 아무리 직원 특가라고 하지만 일하는 도중 쉬러 온 곳에서 향수를 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 날 하루 판매를 위해 진열된 향수 때문에 지하 2층은 훨씬 어수선했다. 


그렇게 지하 2층에서의 직원 할인 판매가 끝날 줄 알았더니 다음 날은 핸드폰, 또 그 다음 날은 등산화로 매번 상품이 바뀌면서 계속되었다. 저기서 얼마나 많이 살까 싶었지만, 직원 대상 할인 판매는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두 가지 상품을 그 좁은 공간에서 같이 파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식당과 화장실, 물류 창고는 사람들과 높게 쌓인 물건들로 바글바글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직원들이나 식당 또는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그 물건 진열대를 비켜 서 있어야만 했다.  


영화 속이나 현실이나 마트나 백화점이나 상황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백화점 직원들은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온종일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직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 수준만큼 직원들의 처지를 생각해 주는 곳은 백화점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영화 카트를 보며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는 마트 근로자의 투쟁도 눈부셨지만, 탈의실이라는 공간에 유독 눈이 간 이유는 이런 현실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