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사립대학 기성회비가 수업료 명목으로 통합된 이후 16년 만에 국·공립대학에서도 기성회비가 사라졌다. 3월 국회에서 통과된 ‘국립대학의 회계 설치 및 재정 운영에 관한 법률안(이하 국립대학 회계 법안)’ 때문이다. 이 법의 통과로 국·공립대학에서 이전까지 학생들로부터 기성회비 명목으로 걷어왔던 돈을 수업료 명목으로 계속해서 걷을 수 있게 되었다. 50년 가까이 법적 근거가 없었던 돈에 대한 근거가 만들어지면서 이젠 합법적으로 같은 양의 돈을 걷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성회비 어떻게 시작되었나?


2차 세계 대전 이후 피폐해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경제발전에 열을 올리던 독일에서는 대학의 등록금이 점차 없어지기 시작했다. 194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공부하던 22살의 한 대학생이 수업료가 위법이라고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어 비슷한 소송들이 독일 전역에서 일어났고 결국 독일의 모든 대학교에서는 등록금이 없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비슷한 시기, 박정희 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우리나라 또한 경제발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교육기관들은 정부로부터의 부족한 예산 지원 때문에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부족한 교육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1963년 학교(초·중등학교 포함)마다 후원회 성격의 기성회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고, 1964년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 ‘훈령’으로 ‘대학, 중·고등학교 기성회 준칙’이 만들어졌다. 기성회의 설립으로 학교에서는 시설 확충·수리비, 운영비 등에 필요한 돈을 기성회비라는 명목으로 학생들로부터 걷었고 심각하던 재정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기성회는 과도한 교원 후생비 지출, 징수 과정의 문제 등의 발생으로 등으로 1970년도에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초·중등학교에서는 이후 기성회 해체와 비슷한 기관의 설립이 반복되다가 의무교육 원칙에 따른 무상교육이 시행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고. 현재는 고등학교만 관련 예산이 배정되지 않아 기성회 성격의 조직이 남아 약간의 돈을 걷고 있다. 


하지만 대학의 기성회는 19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살아 남았다. 사립대학의 경우 1999년 기성회비가 수업료로 통합되면서 없어졌지만, 국·공립대의 경우 2014년도까지 계속 남아 국립대학 재정의 약 46%를 차지하게 이르렀다. 


낼 필요 없었던 그 돈, 기성회비


경북대학교 신문


기성회비는 문교부 장관의 훈령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법적인 근거가 미비한 돈이었다. 이는 학생들이 기성회비를 내지 않아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의미이며, ‘기성회’라는 조직에 회원으로 등록되지 않은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기성회비를 낼 의무 또한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성회비는 학생들에게 있어 ‘굳이 낼 필요가 없는 돈’ 혹은 ‘자율적으로 내도 되는 돈’으로 인식해도 되는 돈이었다. 하지만 대학의 기성회비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음에도 관습적으로 내야 하는 돈으로 남아있다. 


대학별 기성회비 규약을 보면, 기성회는 “설립자의 부담으로 미치지 못하는 긴급한 교육시설, 학교운영 등을 지원함으로써 면학 분위기 조성과 교육여건 개선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기성회비는 국·공립대학의 실질적 설립자인 정부의 부담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쓰이지 않았다. 정부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비용들이 기성회비로 충당되었다. 정부가 재정적인 지원을 해야 할 교·직원의 ‘급여 보조성 인건비’ 문제와 시간강사의 인건비, 자산적 경비(국립대 시설비, 자산취득비, 토지매입비 등)와 공공요금 국고 부족분에 기성회비가 사용됐다. 


기성회비는 ‘국립대 등록금 인상의 주범’이라는 지적도 계속 받아왔다. 국립대학의 회계는 일반회계(국고회계)와 기성회계(비국고회계)로 나뉜다. 일반회계는 수업료와 같은 교비 회계가 주재원이 된다. 정부는 수업료에 대해 일정한 지침을 제시하고 감독하므로 학교는 재량에 따라 교비 회계를 늘리거나 줄일 수 없다. 


하지만 기성회계는 기성회비가 주재원이며 비국고회계이기 때문에 학교 재량껏 늘릴 수도, 사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입학금이나, 수업료를 동결하고 대신 기성회비를 인상해 재정의 필요한 부분을 확충했다. 2014년 국립대 연간 평균 등록금 418만 원 중 기성회비는 298만 원(약 71%) 수업료는 120만 원(약 29%)이다. 기성회비는 국립대 학생들의 등록금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기성회비 관련 지적 사항들


기성회비와의 전쟁


Ⓒ1988년 매일경제 신문 9얼 3일


등록금 투쟁과 더불어 기성회비 문제가 큰 이슈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1988년 9월 ‘대학등록금 자율화 정책’ 이후다. 이 정책은 국립대의 입학금 및 수업료의 경우 문교부 장관이 결정하고, 기성회비는 대학 소요교육비를 고려해 대학이 자율 책정할 수 있도록 한 조치다. 단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학 운영에 관해 대학 상호 간의 협동을 목표로 설립된 단체, 이하 대교협)와 사전 협의하도록 권장하며, 사립대의 경우 입학금과 수업료 및 기성회비는 대학별 소요교육비를 고려해 적정수준으로 책정하되 역시 대교협에서 협의토록 권장하는 것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정부의 등록금 자율화 정책 이후, 초기에는 등록금을 올리는데 눈치를 보던 사립대학들은 등록금을 인상하기 시작했다. 상승률은 1990년대 이후부터 매년 물가상승률을 훨씬 상회했다. 등록금 측정에 대한 권한이 사립대학으로 이양되자 사립대학에서는 재정투자 여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해서 등록금 인상을 추징한 것이다. 국립대학도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올릴 수 있는 기성회비를 폭발적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등록금이 천정부지로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1999년 일부 사립대학의 학생들은 1학기 등록금 중 기성회비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만으로 학사등록을 하려다가 대학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사립대학생들은 기성회비를 뺀 등록금을 법원에 공탁하는 방식으로 기성회비 폐지운동을 벌였고 또한 대학생들이 대학을 상대로 소송(기성회비 채무부존재확인의 소와 학생지위보전 임시처분신청)을 제기했다. 


사립대학 총장협의회는 학생들의 연이은 소송이 진행되던 가운데 당시 하계 대학 총장세미나에서 "금년(1999년) 2학기부터 준비된 대학을 시작으로 기성회비를 수업료에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대교협에서도 사립대학 총장협의회에서 나온 기성회비에 대한 합의사항을 각 대학에 보냈다. 내용은 올해(1999년) 2학기부터 준비된 대학별로 기성회비제도를 폐지하고, 이전까지 기성회비로 걷었던 돈을 수업료로 통합하여 징수하라는 것이었다. 


교육부 또한 ‘기성회비 징수방법 개선에 따른 연구비 비과세 협의 내용 통보’라는 공문을 보냈다. 공문에는 기성회 청산에 대하여 적정한 절차를 거쳐 향후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교육부 또한 기성회비의 수업료 통합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것이다. 


이후 서울지역 14개 대학 총학생회는 "사립대학들이 담합해 수업료와 기성회비를 통합 징수키로 한 것은 공정거래법 제19조의 공동행위 금지규약을 위반한 것"이라며 학교 측을 공정거래 위원회에 재소했다. 한 달 후인 9월 9일에는 전국 60여 개 대학 총학생회에서 2학기 등록금 납부연기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립대학 학생들의 기성회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후 두 달을 못 가 매듭지어진다. 


1999년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학생들이 제기한 소송에 관하여 “기성회를 대신하여 학교 측에서 그 금액을 정하고 직접 징수하는 것이 교육계의 오랜 관행으로 확립됐으므로 기성회비의 납부의무를 부담시키는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후 학생들이 공정거래위원회에 학교를 재소한 것 또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위반되지 않았음이 대교협에 통보되었다.


이로써 사립대학에서는 기성회비가 수업료로 통합되면서, 학교에서는 이 전과 달라진 게 없는 등록금을 수업료 명목으로 걷을 수 있게 되었고, 학생들이 법원에 기성회비의 문제를 제기한 것 또한 ‘오랜 관행’이란 이유로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으면서 사립대학의 기성회비는 사라지게 되었다.



 대학교육 연구소 '1990년 이후 등록금 인상률 현황'


기성회비 투쟁, 국립대도 동참


국공립대학의 경우 기성회비는 물론 등록금의 액수 자체가 적었기에 기성회비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않았다. 국·공립대학에서 기성회비가 공론화가 되기 시작된 시점은 2010년도부터다. 계기는 2010년 11월, 서울대, 경북대 등 전국 8개 국·공립대학생 4,085명이 법적 근거가 없는 기성회비에 대해 반환 소송(제1차 기성회비 반환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2012년 1월에 있었던 1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기성회비 징수의 법적 근거가 없다"며 국·공립대학생들의 손을 들어줬고, 기성회비 반환에 대한 줄소송이 시작됐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민법상 부당이득금(여기에서는 기성회비) 반환 소송의 소멸 시효는 10년.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소송을 청구할 수 있는 모든 학생(졸업생 재학생 합쳐 약 195만 명)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만약 2002년부터 2012년까지의 모든 학생이 기성회비 반환 소송을 제기한다면 반환 금액은 약 13조 원에 이른다. 


1차 소송 승소판결 이후 2012년 5월에는 20개 국·공립대 재학생 1만1000명과 졸업생 200명이 기성회비 부당이익금 반환 청구 소송(2차 기성회비 반환 소송)’에 참가했다. 이후에도 기성회비 반환에 대한 크고 작은 소송들이 2014년도까지 이어졌다. 국·공립대 학생들의 기성회비 반환 소송 제기에 대하여 재판부에서는 대학의 기성회비 징수에 법적 근거가 없다며 연이어 학생들의 ‘승소’ 판결을 내려졌다. 다만 재판부에서는(1차 기성회비 소송 당시) 기성회비의 징수와 관련하여 국가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시사인



*대표 이미지 ⓒ경북대학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