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20대'에 대한 인상비평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청년이슈팀의 [청년연구소]는 청년과 20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분야의 학술 텍스트를 소개하려합니다. 공부합시다!


이번 청년 연구소는 예술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에 주목하여, 오혜진이 저술한 논문 '순응과 탈주 사이의 청년 좌절의 에피그램'을 살펴본다.


음악이든, 문학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우리가 예술을 탐구하고 유희하는 행위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다. ‘자신의 모든 작품은 자서전’이라고 한 괴테의 말처럼 예술은 작가 개인의 내밀한 상상에 기반을 두고 창조된다. 관객들은 개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주관으로 작품을 즐긴다. 하지만 사적인 예술은 그 자체로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작가의 상상과 관객의 경험이 ‘사회’라는 공통의 공간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은 작품에 담긴 메시지에 감정을 이입하고 사유한다. 이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가 선 자리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저자는 소설 ‘철수사용설명서’, ‘유령’, ‘표백’에서 구현되는 청년들의 모습을 분석한다. 세 소설은 현재 청년 세대의 좌절과 분노, 저항을 극명하게 보여준 소설들이다. 논문은 청년들의 절망과 좌절이 어디서 오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담긴 철학적 논의를 차용한다. 피로사회는 긍정이 넘치는 성과중심의 사회에서 개인이 가지는 정신적 피로감이 낙오자를 만들어냄을 지적하는 책이다. 이에 근거해 저자는 세 소설 속의 인물들이 “신자유주의의 부적응자”로, “성과주체의 역반응”을 보여준다고 정의하며, 그것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사회에 대한 대응 방식임을 주장한다. (세 소설을 분석하는 순서는 청년 주인공의 큰 좌절과 우울, 극단적인 대응 방식 등을 고려해 전석순의 ‘철수사용설명서’, 강희진의 ‘유령’ 장가영의 ‘표백’으로 이어진다.)

 

ⓒ(왼쪽부터) 한겨레출판, 민음사, 은행나무

순응과 체념사이 :: 전석순의 '철수사용설명서'


'철수사용설명서'는 제목 그대로 ‘철수’를 사용하는 설명서의 형식을 가지는 소설이다. 작품은 청년들이 제품으로 취급받고 있는 현실을 풍자적이고 자조적으로 그린다. 173cm의 키에 65kg의 몸무게, 지방 국립대 졸업생인 평범하기 짝이 없는 29세 철수는 취업 준비생의 전형이다. 하지만 ‘평범함’은 곧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것으로 치환된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계량화된 외국어 점수, 봉사활동 시간, 공모전 수상 경력 등에서 함량 미달로 취급받는다. 사회가 평균으로 정해놓은 ‘규격’에 맞춰지지 못한 철수는 자신이 평균 이하라는 자책감에 위축된다.


철수는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낙오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유년시절부터 부모마저 철수를 능력과 학습 위주로 평가하지만, 그는 피아노를 잘 치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닌 ‘불량제품’인 것이다. 연애도 성공할 능력이 없는 ‘적당하지 않은 제품’이기도 하다. 철수는 씁쓸하고 덤덤하게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나아가 자신과 같은 불량품들을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은 여기서 더 나가지 않는다. 철수의 씁쓸한 감정은 분노로 유발되지 않으며, 타자에 대한 공감의 표시는 연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철수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며 순응, 체념, 열등감이 몸에 밴 청년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를 통해 소설은 철수를 그저 철수로써 보지 못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며, 오직 능력만으로 서로를 평가하는 관계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타자의 좌절과 반항 :: 강희진의 '유령'


철수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청년들을 대변한다면 '유령'의 주인공 ‘하림’은 탈북자라는 철저한 타자로 설정된다. 탈북자의 살인사건으로 시작되어 범인이 밝혀지는 추리 서사의 양식을 취한 듯 보이지만, 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배제된 청년세대의 삶이다. 소설은 하림이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소외받고 주변화된 청년들이 배타적 사회에서 받는 상처를 직시한다. 


하림은 가족도 없이 홀로 탈북한 채로 외로움과 좌절로 인해 게임에 빠져든다. 좌절은 뚜렷한 계기가 있다기보다 탈북자로서의 불안과 공포, 대한민국 사회가 가지는 비정함, 안정되지 못한 생활, 타인과의 유대감 부족 등이 뒤섞인 결과다. 영원히 타자일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을 지우고 하림은 가상공간인 게임으로 도피한다. 게임은 그에게 정신적 불안의 탈출구이다. 그 속에는 자신을 하나의 팀으로 함께 해주는 동지들이 있고, 현실에는 불가능한 유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철수사용설명서'가 상품화된 청년세대에 대한 풍자와 역설로 가득 찼다면 이 소설은 냉소와 절망으로 채워진다. 하림에게는 ‘희망’을 품는 것 자체가 요원해 보인다. 그것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질 수 없는 희망을 거부하는 몸짓은 반항적이며, 현실을 부정하는 탈주는 위태롭다. 동시에 그의 좌절의 정도를 대변한다.


역사 거부 혹은 분노 :: 장강명의 '표백'


자살 선언으로 현재 청년들의 저항을 보여준 장강명의 작품은 보다 극적이다. 소설에서 등장인물 ‘세연’은 외모, 재력, 성적 등으로 주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대학생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표백세대’로 일컫는 그녀는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25살의 나이에 자살을 한다. 


작가가 정의하는 표백세대란 민주화, 산업화 등의 사회적 발전을 이룩하여 ‘더 이상 보탤 것도 제할 것도 없는 완벽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다. 이들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라고 여긴다. 소설에서 드러나는 자살선언은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운동”이며 “저항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논리적으로 기능하는 저항”이다.
 

세연은 자살선언을 통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는 것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임무이며,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라는 냉소 어린 진단을 내린다. 개인은 시스템의 부속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사회를 유지시킨다는 논리에 대한 비난이다. 시스템 바깥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세연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던져버리는 항거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나의 상처’에 대한 위로, ‘우리의 상처’에 대한 공감 


논문의 시각에 따라 세 소설을 분석할 때, 철수, 하림, 세연으로 대표되는 청년세대의 좌절은 시대적 징후일 뿐이다.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와 (정치제제로서)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정체성을 강제함에 따라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세 명이 겪는 정체성의 위기는 사회의 ‘룰’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드러나는 것으로 단일화된다. 이를 대응하는 방식만 체념과 순응, 반항과 탈주, 분노와 현실 거부로 나누어진다.


청년들이 느끼는 좌절을 오직 구조 중심적 시각에서 결정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포용되는 길을 걷는 것에 대한 압박, 경쟁에서 뒤처지면 탈락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조금 더 배려돼야 할 것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상처의 개별성이다. 사람이 100명이라면 100개의 서로 다른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질적인 청년들의 마음이 서로를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지, 그들의 연대를 이끌 방법을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이다.


공감과 연대가 가지는 의미는 간명하다. 사회는 거대하고 항상 우리보다 힘이 세다. 가끔 개인의 존재가 한 점의 모래알에 불과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개인의 상처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 작은 존재인 사람이 중심을 잡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공감’이다. ‘너도 나도 상처 받았다’는 동의는 나의 존재에 대한 인정으로 이어진다. ‘나만의 상처’가 아닌 ‘우리의 상처’로 확장될 때 비로소 시대에 관한 문제의식이 가능해진다. ‘우리의 상처’로 연결된 개인은 비로소 사회에 대항할 힘을 가진다. 그 안에서 개인은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며, 그것에 따라 삶을 조직함으로써 온전한 정체성의 회복을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