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SIWFF)가 개막하여 성황리에 축제가 이어지고 있다. 17회를 맞이한 SIWFF는 전 세계 37개국의 여성 영화 111편을 상영하며, 다양한 토크 및 이벤트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특히 올해의 주요 쟁점은 ‘페미니즘’이다. <가슴을 허하라>, <분노할 때 그녀는 아름답다>를 비롯한 여성주의 영화가 집중적으로 상영되었다.


30일에는 페미니즘 이슈를 논하는 토론의 장도 마련되었다.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오픈 토크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에 다섯 명의 논객들이 참여했고, 오늘날의 페미니즘에 대한 자유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패널 / 난새(언니네트워크)

손희정(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정(페미니즘 자율학습 멤버)

최지은(웹매거진 ize 기자)

한윤형(자유기고가)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을 바라보며


올 초 SNS를 뜨겁게 달군 건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이었다. 트위터를 중심으로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선언이 이어졌다. 김 군 사건에서 불거진 여성혐오 현상을 비판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부당한 낙인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위함이었다. 오픈 토크에 참여한 패널들은 SNS상에서의 페미니즘 선언 운동의 의의와 한계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 평화뉴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은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성차별 문제는 항상 존재했고, 지금도 건재하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최근의 여러 현상과 함께 대중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셈이다. 더 많은 여성들이 그동안 참아 온 성차별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하게 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선언은 큰 의의를 지닌다.


최지은 / 해시태그 선언 운동은 아주 빠르게 확산한 이유는 그동안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없던 억압이 강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욕을 먹지 않을까”, “나 같은 사람이 감히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란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꺼낼 수 있게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페미니즘이 가시화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난새 / 페미니스트라는 선언은 페미니즘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내게는 그 해시태그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해주려고 하는 이들이라고 다가왔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다양한 결로 풀 수 있다는 게 재밌었다.

 

 

한편, 온라인상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여성운동과의 실질적인 연대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다. 패널들은 해시태그 운동이 단순한 선언으로 끝나는 것을 우려하며, 진정한 연대로 나아가려는 방안을 고민했다.


최지은 /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인식하고 살아온 것과 선언을 하는 건 다른 차원이다. 페미니스트 선언 이후에는 앞으로 페미니스트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이 따른다. 최고의 연대는 돈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도 사회 변화를 이끄는 데 내가 실질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다 정기 후원하는 단체를 늘리게 됐다. 


손희정 / 이 운동을 짓밟고 폄하하려는 진영의 논리에 따라 이 운동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건 막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고민은, 익명 뒤에 숨어 선언에 동참한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의 변화에 동참할 수 있느냔 질문이다. 입금이 진정한 연대일까? 좋아요 한 번 알티 한 번이 연대일까? 후원이 실질적인 큰 변화에 동참하지는 않으면서 자기 위안만 주는 게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 선언했던 이들이 입금뿐 아니라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단순히 단체에 회원가입을 하거나 후원했다는 인증 외에도 설치고 말하고 떠들고 프로젝트로 만들어서 에코백을 생산하기도 했고. 많은 여성단체가 이 흐름을 이어받고 있는 점이 긍정적이다. 저마다 상영회를 하고 강좌를 진행하는 등 다양한 양상으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한윤형 /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지점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나 자신도 선언 운동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 또, 페미니즘에서 거리가 먼 한국 남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대중문화 속 여성혐오 현상, 너무나 만연하다


최근에 다시 한 번 페미니즘이 주모받은 건 여성혐오 발언들이 논란이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빵빵’ 터졌다. 옹달샘(장동민, 유상무, 유세윤)은 팟캐스트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수위 높은 발언을 수도 없이 뱉어냈고, 박용성 중앙대 전 이사장은 “분 바르는 여학생들 말고 남학생들을 많이 뽑아라”고 지시했다. 패널들은 이러한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 현상을 분석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이야기했다. 

 

 ⓒ KBS예능 <해피투게더> 캡쳐화면

 

우선 장동민 논란을 중심으로, 유명인들의 여성혐오 발언에 대한 토크가 이뤄졌다. 옹달샘의 팟캐스트에서 드러난 여성혐오 발언은 수위나 내용이 아주 강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많은 대중이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공감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문제가 축소되었고, 연예인 개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사과까지 한 지난 일 때문에 밥줄을 끊을 셈이냐”는 것이다. 패널들은 이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최지은 / 유명인이라고 해서 그들의 사생활이 대중의 알 권리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문제는 사생활 영역이 아니다. 공적인 영역에서 특정 사항에 대한 폭력적인 발언이 있었던 것을, 연예인 개인의 실수라고 여기고 넘어가는 것에 공감할 수 없다. 여혐 발언들이 매체에서 걸러지지 않고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고, 이들이 출연하는 방송에서 이 논란을 다룬 방식들은 또 한 번의 가해였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이다. (장동민을 향한 대중들의 비판은) 폭력적인 발언을 했을 때, 본인이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만드는 계기다. 이를 두고 장동민을 죽이려고 하냐는 것은(과하다는 지적은) 확대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한윤형 / 밥줄을 끊는다는 표현은, (현재 옹달샘의 밥줄이 끊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안 이루어진 상황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장동민의 경우, 사과에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적시조차 없었다.

 

 ⓒ <일간베스트> 캡쳐 (2015.6.2)


미디어에 만연한 여성혐오 현상에 대한 지적도 이어졌다. 오랫동안 여성혐오는 미디어나 유명인의 입을 통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문제가 있는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강력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패널들은 아무리 여성혐오를 지적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모색했다.


난새 / 언니네트워크에서 <꿰매고 싶은 입>이라는 걸 했다. 여성에게 막말하는 공직자들을 타깃으로 비판하는 어워드였다. 최연희, 이명박, 강용석, 윤창중 등이 대상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됐나? 다들 잘 산다. 연예인도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은 그 밑에 더 뿌리 깊게 만연한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장동민 사태가 이 뿌리를 근절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마음이 든다. 김구라도 지금 방송 잘하고 있지 않나. 늘 싸울 때, 내가 힘이 없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가장 힘이 든다. 더 많은 사람이 열의를 갖고 함께 싸움해야 한다. 


 / 현재 미디어에서 여성혐오 표현들이 화제가 되는 건, 이제야 그것들이 문제라는 인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전부터 쭉 있던 것들이 이제야 많이 말해지고 있다. 혐오의 표현 자체에 집중하기보단 혐오 저변에 있는 것들을 다뤄야 한다


손희정 / 장동민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끝날까 봐 염려된다. 장동민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끝없이 이뤄나길 바란다.

 

 ⓒ <코미디 빅리그> 캡쳐화면


여성‘혐오’ 발언으로 물의를 빚지 않았더라도, 미디어에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양산하고 성차별을 드러내는 프로그램이 많다. 예능과 코미디 프로그램, 영화 등에서 여성들이 남성중심사회의 타자화에서 벗어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을까?


최지은 / 2주간 방영한 예능 프로그램을 조사했더니 여혐 발언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코미디 빅리그>의 한 프로는 무술의 고수에 도전하는 어린 여자에게 강제로 키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가 놀라서 도망치니 무술의 고수가 “여자는 이렇게 다루는 것”이란 식으로 말한다. 이게 이 코너의 웃음 포인트다. 이런 장면을 코미디로 만들고 반복적으로 방송할 만큼 인식이 부족하구나 싶다. 예능에서는 여자들은 명품백만 사주면 된다는 코드가 웃음 포인트로 반복된다. 이 명품백 농담들로 인해 (현실의 여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폭력이 더 이뤄졌을까. 남성들에게 여성에 대한 인식을 얼마나 잘못되게 만들었을까. (젠더 이슈는) 미디어를 만드는 사람들이 굉장히 고민해야 하는 부분인데, 현재로써는 고민도 없어 보이고 제기된 문제에 대한 반성도 거의 안 느껴진다.


손희정 / 지금 한국영화를 보면 여성이 중심이 되는 영화가 박스오피스에 얼마나 있나. 90년대까지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IMF 이후, 한국사회가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남성을 사회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남성이 얼마나 힘들고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주목하면서. 그 과정에서 여성들은 어디로 갔나.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는 남성들을 소비하는 것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었나. 미디어 산업과 여성이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고민하며, 대중문화에서의 일천한 상상력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6시에 시작된 오픈 토크는 한국사회의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누며 2시간가량 이어졌다. SNS 선언 운동 이후 우리의 페미니즘은 어디쯤 와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고민은 끝없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부대행사 <오픈 토크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에서 다룬 이야기는 그 고민의 한 조각이다. 더 많은 목소리와 더 많은 연대가 필요하다.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기억에 깊이 남아 있는 패널들의 ‘말말말’로 오픈 토크 기록을 마친다.


손희정  / 변화는 시끄럽게 문제를 제기해 온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


최지은 / 이제는 (내가) 예민한 여자로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야 하지 않나 싶다.


한윤형 /  한국 남자 중에는 “한국에서 남자로 태어난 건 불행이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불행 중 다행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다. 나는 택시를 타면 잘 수 있다. 택시 기사가 떠들 때 조용히 해달라고 말할 수 있다. 택시가 안 잡히면 길 건너편에서 잡을 수 있다. 여자들은 이런 걸 못하는 경우가 많다더라. 이런 이야기를 남자들은 모른다. 계속 대화하고 남자들에게 설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난새 / 페미니즘에 대한 비난이 있을 때, 부정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자긍심으로 만들어 내는 것도 약자들이 할 수 있는 운동의 방식이다.


  / 페미니즘 연대는 우정으로 하는 게 아니다. 뜻에 동참하기 때문에 하는 거다. 우리가 연대했기 때문에 그들도 연대해 줄거라는 기대감은 버려야 한다. 그건 우리를 상처받게 할 뿐이다. 우리 모두가 지치지 않고 꾸준히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사진. 달래(sunmin532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