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0원. 2015년 대한민국의 최저시급이다. <고함20>은 6월 29일, 내년도 최저시급 결정 일을 앞두고 최저시급에 대한 연재, "마지노선의 최저임금"을 시작한다. 연재는 현행 최저시급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해, 최저시급 인상안을 놓고 오가는 쟁점들을 짚어보고 최저시급에 관한 다양한 시각의 이야기를 다룬다. 5,580원. 2016 대한민국의 '마지노선'으로 충분한가?

 

과거의 조각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지금 가지고 있는 선명한 감정이 먼 훗날에는 기억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1년 전의 순간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오늘이다. 매일 쓰는 다이어리를 펼쳐봐야 비로소 그때의 감각을 가늠하는 정도다. 재현된 감각조차 추상적이어서 ‘이때 이랬구나’ 정도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잔상이 오래가는 시기는 누구나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는 2008년도가 그렇다. 아빠가 쓰러지지 않으셨다면, 그저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연도로만 남았을 해이다. 처음으로 춘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동생은 자고 있고, 아침 밥상에서 엄마 아빠한테 "교복이 커서 별로"라며 투정을 부렸다. 양치를 하고 "다녀오겠습니다!" 소리치며 집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


등교하고 몇시간 쯤 흘렀을까. 점심 전 쉬는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따로 부르더니 "엄마에게 연락해 병원을 가보라"고 했다. 수화기 너머 "길병원으로 오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몰랐던 탓인지, 그저 이른 시간에 하교한다는 사실에 들떠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이 아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였던 것 같다.


아빠는 대동맥 박리라는 생소한 병명을 진단받았고, 며칠 후 20시간이 넘는 큰 수술을 받았다. 천 단위였던 수술비가 어떻게 마련되었는지 모르겠다. 그건 어른들이 해결할 문제였으니까. 내 피부로 돈의 문제가 다가왔던 것은 수술 이후부터였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모든 장기와 혈관을 인공으로 바꾼 후유증은 컸다. 2년 정도의 회복기가 필요했다. 그동안 부동산을 운영하던 아빠의 수입은 단절되었다.


고등학생인 나와 초등학생인 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학교를 다녔고, 틈이 날 때마다 병원을 찾아가 아빠를 돌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엄마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고, 아빠가 병원에 입원해 있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40대 중반을 넘어선 엄마는 일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당시 내 머리 속에 직장인으로서 엄마의 모습은 간호사가 전부였다. 몇 살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긴 과거에 엄마가 일하는 병원 앞을 찾아간 기억 때문이다. 예상과 달리 엄마의 새 일터는 삼촌네 가게, 그리고 결혼식장의 뷔페였다. 애초부터 엄마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몇 개 없었을 터였다.


엄마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삼촌네 가게에서, 금토일에는 뷔페에서 일을 했다. 하루도 쉬지 않았다. 아니, 쉴 수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엄마는 하루 안 나가면 생기는 몇만원의 공백을 아쉬워했다. 어느 일터로 향하든 출퇴근은 나의 등하교 시간과 맞물렸다. 내가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주말의 출근 시간은 더 빨랐다. 뷔페에 들어찬 수많은 음식은, 첫차를 타고 출근해 밤 10시에야 퇴근하는 직원들의 피땀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뷔페에서 3일 간의 고된 노동이 끝나는 일요일 밤마다 엄마는 역으로 나를 부르곤 했다. 나는 엄마의 가방을 대신 들고, 평소의 몇 배는 느린 발걸음에 맞춰 마트로 향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 시장을 보는 일은 거의 빠지는 일이 없었다. 장바구니에는 라면, 시리얼, 식빵과 초코파이류의 인스턴트 빵이 고정적으로 담겼다. 굶기지 말자는 엄마의 다짐이 장바구니에서 읽히는 듯했다. 동생과 나는 그것들을 아침-저녁으로 돌려가며 챙겨 먹었다. 식탁 위의 수준이야말로 우리 남매가 느끼는 가장 큰 변화였다. 밥상을 둘러싸고 앉아 투정을 부렸던 아침의 풍경은 소원한 존재가 되었다.


장을 다 보면 엄마는 흰 봉투에서 현금을 꺼내 계산했다. 그 봉투는 하루 16시간의 노동을 완수한 결과물인 동시에 우리 가족의 생계 수단이었다. 또한 엄마의 고용에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하루의 노동 값을 그 날 바로 받는다는 것은 곧, 다음 주에는 안 불러도 된다는 암묵적 동의를 의미했다. 그 일자리의 정체성은 24살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와 맥을 같이 한다. 고용의 불안정성뿐만 아니라, 임금이 결정되는 수준도 말이다. 아직도 10만 원이 조금 부족했던, 천 원짜리와 동전까지 담겨있던 봉투를 잊지 못한다.


봉투 몇 개가 모이면 나의 학원비가 됐고, 더 많이 모이면 병원비가 됐다. 그 쓰임 안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영화 한편’의 비용은 묵살되었다. 소비에서 취미 ‘따위’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다리를 끌고 올 정도로 아픈 날에도 택시를 타지 않으셨는데, 영화가 무슨 허울 좋은 소리였을까. 이 와중에도 엄마가 절대 포기 않았던 한 가지는 나의 학원비였다. 그것은 이 땅에서 부모가 가지고 있는 교육에 대한 강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원을 끊겠다’고 먼저 말하지 않은 나도 참 모진 딸이었구나 싶다.

 

지난 2월 7일 알바노조는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집회 시위를 열었다.

 

최저임금, 그것은 사회 전체의 안녕과 행복을 결정하는 문제


7년의 시간이 흘러, 우리 가족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감사한 일이다. 돌아올 ‘원래’의 모습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빠가 고칠 수 있는 병이었다는 ‘우연’이 말이다. 때로 ‘만약’이라는 두려운 상상 속에서 우리 가족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두려움의 정체는 그 시기가 내게 부정적 형상으로 남았음을 증명한다. 나의 일부를 타자화 함으로서 얻는 가냘픈 위안에 슬퍼하며, 이내 ‘두려운 상상’을 현실로 살아가는 이들을 그려본다. 예상하지 못한 질병을 곁에 둔 사람들, 타인의 도움 없이 생존이 어려운 장애를 가진 사람들, 실업으로 인해 급격한 소득 감소를 경험하는 사람들, 퇴직과 함께 소득 절벽을 마주한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 …


노동으로 삶을 일구어야 하는 이 땅에서 임금은 곧 인간다운 생존을 결정한다. ‘인간다운’이라는 단어는 주관적이기에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다. 개인적인 관찰이 주는 의미에서는 이러했다. 영화 한 편 보는 값이 아깝지 않은 것, 길거리를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옷 한 벌 살 수 있는 것, 몸이 아픈 날은 고민 없이 택시를 탈 수 있는 것, 티브이에 나오는 멋진 곳으로 가끔씩 여행을 갈 수 있는 것. 너무 사소해 보여서 인식하지 못하지만, 박탈을 당하는 순간 가장 간절해지는 것이 인간다움을 만든다. 남들에겐 소소한 기쁨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꿈으로 바뀜으로써 인간다움은 위협 당한다.


노동력을 상실한 이들, 또는 그가 속한 가족 구성원이 일차적으로 부딪히는 난관이 바로 인간다움의 위협이다. 위협의 칼날은 사회 구성원 대부분에게 향할 수 있는 보편적 가능성을 가진다. 이 땅의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는 문제를 우리는 ‘사회적 위험’이라 부르며, 국가는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구제해주는 일련의 제도를 ‘사회 안전망’ 안에 장치한다. 그리고 사회 안전망의 최전선에는 최저임금이 있다. 최저임금은 수입의 100%가 최저임금 수준에서 결정되는 저임금노동자의 생활 안정을 행정적으로 '보장'한다. 평균및 최하층을 '보장'하는 수준이 곧 국가의 수준이다.   


6월이다. 최저임금 수준이 심의․의결되는 시기를 앞두고,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움직임이 활기차다. 최저임금 투쟁은 단순히 ‘최소한의 물질적 생활을 보장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수준’을 요구한다. 그곳에서 들리는 처절한 목소리가 과거의 감각을 들춘다. 최저임금이 3,770원이던 2008년 우리 엄마의 삶은 안녕했을까. 그리고 7년 이 지난 2015년, 최저임금 5,580원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안녕할까. 그들이 영화 한편의 여유를 부리길 바라는 마음, 여기서 최저임금 운동은 시작될 것이다.

 

글/사진. 아호(9208kjh@daum.net)

[마지노선의 최저임금] 기획/아호. 감언이설. 상습법. 종자기. 베르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