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광이 잘 되는 집, 절제되고 세련된 모노톤의 인테리어, 깔끔하고 편리한 주방, 애정 넘치는 침실, 정리가 잘 된 드레스 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거실 한쪽 벽면 빼곡이 들어찬 책.
내가 좋아하는 책 한 아름 
아직 읽지 않은 책 조금 
그리고 앞으로 읽지 않을 책 많이.



스무 살 이후, 살고 싶은 집의 모양새를 자꾸만 그리게 된다. 개인적인 성공보다 따뜻한 가정에 대한 소망이 더욱 절실해 지기 때문이다. 난 주로 나의 거실을 상상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TV 대신에 거실 양면을 책장으로 채우고, 글 쓰고 공부하기에 좋은 보수적인 사각 책상을 놓는 상상. 그 무엇보다도 책이 중심이 되어 살아 숨쉬는 집을 꿈꾼다. 현재 남자친구가 좋았던 많은 이유 중 하나도 많은 책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덕분에 가족 서재에 대한 공상이 더욱 현실감 있어졌다.


전자책 시대

더욱 더 많은 책을 꽃아 놓고 싶다는 나의 열망과는 반대로 전자책으로의 시대 전환이 급격해 졌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는다. 지금까지 전자책 시장은 한정된 수요와, 종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기기들 때문에 많이 발전하지 못했지만, ‘아이패드’와 ‘갤럭시 탭’과 같은 태블랫 pc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아마존의 ‘킨들’ 아이리버의 ‘커버스토리’는 책을 많이 구매하던 층에서도 호감도가 높아 e-book시장도 활기를 띄고 있다.

‘킨들’과 ‘커버스토리’의 경우 wi-fi도 되는 첨단 기기이면서도 e-ink화면으로 흑백의 인쇄된 품질을 추구하는 고전적인 면을 갖추고 있어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전환하는데서 생겨나는 심리적 비용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날로 LCD화질에 예민해져 가는 시대에 전자책은 역의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면 책의 형태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놀랄 만큼 고정되어 있는 면이 있다.


종이책이 주는 낭만성




내가 보수적인 부분이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대부분 새로운 매체와 함께 찾아왔다. CDP에서 mp3로의 이행을 적응하지 못한 나는 음악을 자주 듣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3D영화도, 전자책도 마찬가지였다. 3D영화 <아바타>를 보고, 동의하기 어려운 색감과 3D를 위해 재편성 된 액션에 어지럼증만을 느끼며 3D가 2D영화를 모조리 대체할 리는 없다고 외쳤다. 하지만,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유성 흑백영화가 컬러영화로 옮겨갈 때마다, “이런 건 영화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부적응자들이 있었다고들 하니, 나도 딱 그 정도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 사는 이들을 한심하다 생각하곤 하는데, 나를 돌아보니 나의 과거란 상대적으로 현재에서 가까운 것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책은 인생 내내 나에게 중요한 일부였다. 집 근처에 큰 서점이 있던 것은 큰 다행이었다. 주말 마다 서점 바닥에 쭈그려 앉아 많은 책들을 읽었고, 나빠지는 시력 때문에 엄마가 책 금지령을 내린 후로는 몰래 서점을 찾았다. 어린 시절의 흐릿한 기억 중에서도 교보문고에 처음 갔던 날은 생생하다. 친구 부모님이 책을 자그마치 열권이나 사주는 모습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책을 훔쳤다가 크게 혼난 일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생일 선물로 가장 많이 주고받았던 것도 책이다. 지금 곁에 남은 사람들 역시 좋아하는 책들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내가 추천해준 책을 그들이 마음에 들어 할 때, 친구가 권한 책이 너무 좋아 주체할 수 없을 때, 그들에 대한 마음도 주체할 수 없어진다.

전자책에 대한 반감이 큰 것은 전자책이 이러한 경험들을 제공할 거라고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에 소장하는 cd들과 구매한 mp3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영화관에서 본 영화와 70원짜리 다운로드로 본 영화가 다른 감상을 주는 것처럼 e-book을 종이책처럼 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자책이 가장 각광받는 분야는 논문, 전공 책, 레퍼런스 북 등 학술과 연계된 분야라지만, 파일로 된 수업 자료들도 다 뽑아서 읽게 되는 나는 종이의 질감에 연필이 맞물리는 느낌, 사각대는 소리가 없는 공부는 너무 건조해 필기나 정리의 즐거움이 반감될 것만 같다. 읽은 분량과 남은 분량을 눈대중으로 살피는 행동의 행복을 책 아래편에 뜨는 수치 35/492(7%)는 제공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오래된 책 냄새,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느낌, 책장을 보고 밀려오는 뿌듯함, 어떤 부분을 찾기 위한 뒤적임. 이 모든 것은 종이책의 거부하기 힘든 낭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책 시대



하지만 우리의 부적응은 변화를 받아들이기 싫은 투정인 면도 있다. 우리는 이미 많은 글쓰기를 타이핑으로 대체했고 사각대는 연필소리와 같은 종이책의 낭만성은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일 지도 모른다. 모니터로 활자를 읽는 것은 종이와는 달리 가독성이 떨어진다지만, e-ink로 만들어져 책과 비슷한 수준의 가독성을 보장한다는 기기들을 접해보지 않고 하는 말이다.

종이책을 가지는 것은 전시효과를 위한 허영과 자기만족일 뿐 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책을 들여놓을 공간은 책값과는 비교 안 되는 사치품이며 오래된 종이의 먼지와 곰팡이, 책벌레는 비위생적이다. 무엇보다도 책 때문에 매년 잘려 나가는 나무들을 생각하면 전자책으로의 전환은 더욱 더 빨리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내년이면 1년간 다른 나라에 있게 된다. 한글로 씌여진 인쇄물을 접할 수 없는 환경에서 괴로워 하다보면 전자책 생각이 절실해 질 것이다. 무거운 책 때문에 점점 심해져가는 허리디스크도 전자책 생각이 나게 하는 또 다른 배경이다. 내가 종이책과 결부된 수많은 낭만을 뒤로하고 전자책을 받아들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전자책의 발전을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