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이야기

이야기 하나. 나는 TV에 요즘 자주 나오는 타블로가 영 불만이다. 힙합퍼 딴따라 주제에 높은 학벌을 강조하는 것도 싫고 남들하고 다른 경험을 했다고 유세떠는 것도 보기 싫다. 내가 보기엔 100% 과장인 것 같은데, 몇 가지 의혹도 든다. 친구에게 이야기 했더니 반응이 장난 아니다. 나도 그 XX 보기 싫었어. 아 어쩐지 그거 다 구라였어라는 친구의 반응에 TV를 보고 불편해진 내 마음이 조금 풀린다. 역시 그 놈은 문제가 있다.

이야기 둘. 나는 친구와의 대화로 기분이 풀리지 않아 네이트 톡이나 타블로 관련 기사에 댓글로 내 생각을 올린다. 몇몇은 욕을 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대부분은 나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며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댓글을 남긴다.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는 전혀 다른 공간과 전혀 다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미묘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터넷 매체가 구술 문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인터넷이 구술적 특성이 강화된 형태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매체가 구술 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데 반박할 수도 있다. 물론 인터넷의 모든 의사소통은 문자로 기록된 형태라 문자 문화적 특성도 일부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터넷의 글들은 대체로 구술 문화적 특성을 갖는다. 문자 문화적 매체인 책, 편지, 신문 등의 글은 두고두고 보는 반면에 일부를 제외한 인터넷의 수많은 글들은 존재하고는 있지만 읽히지 않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다. 마치 내뱉은 말이 순식간에 사라지듯이.


타블로 사건과 구술문화


[사진 2] 타진요 앞에서 휴지조각 정도의 가치를 가지게 된 스탠포드 원본 성적표.


‘대중의 성장’이라는 말은 대체로 긍정적인 느낌을 갖는다. 권위에 대항하는 대중은 민주주의와 혁명의 핵심 이미지이며 권위의 붕괴는 다원화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대중의 성장이 언제나 긍정적인 면화를 이끄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예로 타블로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우리는 타블로를 둘러싼 일련의 현상 속에서 지식인과 대중의 대립 현상을 극명히 볼 수 있었다. 대중들은 모든 공적인 것을 부정하고 믿지 못했다. 스탠포드 당국, 교수들과 증명서들은 아무 것도 아닌 휴지가 되었다.

타블로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 대중들의 지식인에 대한 반기가 구술 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구술문화 매체인 인터넷을 통한 소통은 그들의 기반인 동시에 그들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드는 토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주장은 일견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논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다. 첫 번째, 이들의 주장은 누적적이지 못하고 산발적이다. 예를 들어 타블로가 제출한 NSC증명서는 신정아가 자신의 허위 학력을 증명하는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신뢰성이 없다고 했지만, 신정아는 NCS 증명서를 내지 못해 발각된 것으로 NCS증명서가 학력 증명서 중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는 잘못 되었다는 반박이 되면 수정이 되어야 하지만 구술문화의 특성상 한 번 퍼져나간 잘못된 말은 끊임없이 전해지므로 잘못된 근거로 잘못 된 주장을 재생산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헐리우드 스타 리즈 위더스푼이 위키피디아에는 1998년에 자퇴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누구든지 정보를 수정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의 특성상 존재하는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IMDB에는 같은 항목이 2002년으로 나와 있고, IMDB가 더 공신력 있는 사이트인 만큼 2002년으로 생각한다면 리즈 위더스푼은 타블로와 같은 시기에 같은 과에서 공부했던 것이 된다. 이렇게 새로이 업데이트 된 정보들은 논쟁에 반영되지 않는다. 기존의 문자 문화 기반의 토론들이, 반대 진영의 새로운 주장과 근거를 반영하여 반박하는 모습이었던 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두 번째, 이들은 미국 학제와 취업에 대한 지식을 자신의 경험과 지인의 경험에 상당수 의존하고 있다. CIA의 경우 입사는 미국시민권자만 가능하지만 여름인턴은 외국인도 지원할 수 있고 선발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입사가 안 돼는 데 인턴으로는 왜 뽑겠냐. 지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뽑히지는 않는다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녀본 사람들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주장을 펼친다. 일견 상식적이어 보이는 논리로 접근하기는 했지만, 모든 세상의 현상들을 논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가정이 틀린 것이다.

타진요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주장들이 미국 어디어디에서 어디어디 이름 들어본 명문 대학을 다녔다는 어떤 분이 “타블로의 저러한 주장은 제 경험에 의하면 이러이러해서 틀렸네요.”라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타블로에게는 어떠한 증명도 믿지 못하는 자세로 나오면서 내부자들의 의견에는 의심이 없는 것도 구술 문화의 특징이다. 

[사진 3] 1인 시위에까지 나선 타진요 회원의 플랜카드.


타블로논쟁을 둘러싼 네티즌들의 광적인 행동에서도 구술문화적 특성을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던 구술 문화적 특징으로 인한 대중들의 자신감의 생성은 자신이 처음에 옳다고 생각했던 입장을 고수하게 만든다. 남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이야기는 토론의 성격이 아니라 논쟁의 성격으로 치닫게 된다.

또한, 타블로 비판론자들은 위에서 말한 구술 문화적 특성을 간직한 글들을 통해 청자들을 자신의 공동체로 편입시켰다. 마샬 맥루한은 그의 미디어론에서 “구술어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분위기와 합쳐져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가 지금 일어나는 일의 중심에 있다는 느낌을 주며 구술문화는 나와 공동체의 분리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특징을 보여준다.”고 한 바 있다. 타진요 사람들은 타진요 사람들끼리의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 공동체에 속해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다. 자신들의 논리가 옳다는 것을 공동체 안에서 서로 재확인 하고 비판에 대해서는 배타성을 넘어 폭력성을 보이기도 한다. 찬반이 비등하게 나뉠만한 주제에 한 쪽 의견이 훨씬 많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파시즘을 본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말 했던 마샬 맥루한의 말처럼 인터넷 매체가 가지고 있는 구술문화적 성격이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좋지 않은 방향으로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대중은 힘을 얻었고 분명 민주주의에서 대중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들의 소통하는 방식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또한 쉽게 선동 당하며 텔레비전을 통해 자본주의의 논리와 상업성에 언제나 세뇌당하고 있다. 이들에게 미래를 맡기는 것이 바로 현명한 일인지 걱정할 만하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의미

오르테가 이가세트 같은 엘리트주의적 비판론자는 대중의 무지함과 비합리성을 역설하며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었다. 하지만 역사는 되돌아가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는 합리적인 것, 효율적인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목소리를 들으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의 판단은 어떤 것이라도 따라야 하는 것이냐고, 아무리 봐도 부적격인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는 것이 민주주의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부정적인 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타블로사건에서 파시즘을 보기도 했지만 대중들이 자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타진요에서 내어놓는 논리가 왜곡되어 그럴듯 해 보이는 자료들을 보고, 대중들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여론을 바꾸어 놓고 있다. 대중의 다수가 생각만큼 무지한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황우석 사건, <디 워>, 타블로 사건 등 대중의 여론이 한쪽으로 잘못 치우친 사태들을 분석하여, 앞으로의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가짜 논리와 진짜 논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