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고3 수험생활이 끝난 후였다. 내가 논술고사 준비로 한창 바쁘던 시절, 그녀 역시 수험생이었지만 나와는 조금 다른 수험생이었다. 그녀가 지망했던 학과가 연극영화학과였던 것이다. 사실 주변에 의대, 법대, 경영대, 경제학과 등에 가려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예술을 하겠다는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 지금도 그런 친구를 많이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지금도 연극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참 많은 자극을 주곤 한다.

나 혼자만 그녀에게서 받는 긍정적 자극을 받기에는 아깝다 싶어 고함20의 기자 타이틀을 달고 그녀를 인터뷰해보았다. 그녀가 사는 곳 근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인터뷰는 참 인터뷰와 수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 진행되었다. 자 그럼, 중앙대 연극학과에 재학 중인 김지빈을 함께 만나러 가보자.




엄마와의 계약을 위반하다

왜 연극을 시작하게 됐는지, 왜 연극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연극을 하게 된 계기 말이다. 정확하게는 연극을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식상한 질문이라 그런지 또한 식상한 대답, 연극이 매력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중학교 시절, 교내의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며 연극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많은 부모님들이 으레 그렇듯, 학업을 벗어난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던 그녀를 전적으로 응원하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대학교에 가서는 연극을 하지 않으며, 직업으로도 연극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야만 했다. 동아리 활동의 허락에 대한 어머니의 조건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이런 데서 적용되는 걸까. 그녀는 어머니와의 계약을 어찌 보면 참 쉽게 위반해 버렸다. 연극의 매력에 푹 빠져든 그녀는 연극이라면 평생의 업(業)으로 삼아도 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수능 공부 외에 모든 것이 금기시되던 고3 시절에도 그녀는 집인 인천에서 서울을 오가며 좋은 공연을 찾아다녔다. 자율학습을 도망치는 것도 다반사였다.

단순히 연극을 보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한 청소년경제신문의 학생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그 기자라는 신분을 매우 요긴하게 이용했다. 스테이지의 공연을 감상하고, 촬영을 핑계로 백 스테이지에 들어가 보고, 연극인들과 인터뷰를 하며 그녀의 꿈은 더욱 커졌다. 대입만을 바라보며 의자에 꼭 붙어 앉아 있어야 하는 차갑기만 한 고3이라는 시간을 그녀는 아주 뜨겁게 보낸 것이다.

도대체 연극의 어떤 매력이 그녀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만들었는지 물었다. 망설임 없이 연극의 매력에 대해서 줄줄이 늘어놓는다.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시간, 믿을만한 거짓말을 만들어가는 작업, 사람들과의 소통, 모든 수고를 잊게 해주는 관객들의 박수…. 이런 모든 것들 때문에 말이야. 한 번 연극을 해 보면 연극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는 것 같아.”




파란만장 연극영화학과

연극학도가 되기를 꿈꾸던 여고생에서 진짜 연극학도로의 변신. 연극학도의 대학생활은 어떤 모습일까? 대학이 꿈꾸던 것과 많이 달라 괴로워하던 나와 비슷할지 아니면 어떨지가 궁금해져서 학교생활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의 대학 동기인 많은 연예인들 이야기가 듣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보태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머리에 맴돌았던 이미지는 바로 참 ‘치열하다’는 것이었다. 연예인들 많이 다니고 만날 놀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은 정말로 편견일 뿐이었다. 특히 1학년 1년 동안은 거의 선배들의 호출이 있을 때마다 나와서 선배들의 공연을 도우며 일을 해야 하는, 그것이 학교생활이란다. 다른 여대생들이 힐을 신기 시작하고, 화장을 익혀 나가는 그때 연극영화학과 학생들의 학교 차림새는 트레이닝복이란다. 몸으로 뛰어야 하는 일이 너무도 많고, 매일 같이 세트를 만들고 연습을 하면서 흑석동과 대학로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고된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생활 외에도 연극판에서, 영화판에서 경험을 쌓아나가는 그들의 모습이 참 멋있게 들렸다.

고된 것도 있지만, 연극영화학과 생활 역시 예상대로 재밌긴 하나 보다. 연극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을 묻자, 그녀는 주저 없이 신입생 시절의 공연 이야기를 꺼냈다. 

“매해 신입생들은 거의 1년 동안 선배들 공연을 돕는 일만 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동기들끼리 모여서 작은 공연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있어. 제작비, 연습실, 대본 등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걸 처음부터 만들어나가는 식이야. 뭔가 도전 의식을 불끈불끈 솟아오르게 하는 그런 것 말이야. 학기 중 달랑 2주의 기간으로 대본을 짜고, 벼락치기 연습을 해서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일. 그 와중에 일어났던 많은 해프닝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 여전히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정말 맛있는 안주거리이기도 하고.”

비는 강의실이 없어서 야외에서 연습했던 일, 연예인 친구들을 스폰서 삼아 먹고 마신 일, 건물에서 경비아저씨께 쫓겨나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관계를 돈독히 했던 일, 몸 풀기 게임으로 하루를 날렸던 일, 다들 아프니 오늘만 쉬라며 연습 일찍 끝냈더니 집으로 안 가고 클럽 갔던 사랑스러운 배우들에게 배신감 느꼈던 일, 2주간 실컷 놀다가 마지막에 벼락치기 연습을 한 일…. 수도 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가 참 행복해보였다. 




마음과 가슴이 거기 있을 때

Q. 가장 존경하는 연극인은 누구야?

A. 윤석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해.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배우로 더 많이 알려져 계시지. 선생님이 연출하신 작품도 여러 편 있고, <월간 객석>의 발행인이면서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의 대표이시기도 해. 선생님은 내가 여자로서, 엄마로서, 연극인으로서 꿈꾸는 나의 50대의 모습에 거의 일치하시는 분이셔. 다방면으로 다재다능하시고 인격적으로도 매우 존경할 만한 분이신 것 같아.

연극판이 워낙 대학로 중심으로 흘러가다보니까, 나도 대학로에 있는 시간이 참 길어. 윤석화 선생님도 그런 것 같아. 그래서 지나가다 종종 선생님을 마주치곤 했어. 선생님을 마주칠 때마다 존경심에 나도 모르게 목례를 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내가 누군지 잘 모르시면서도 방긋 웃어주시곤 하셔. 그런 선생님의 여유로운 인품도 내가 닮아가고 싶은 부분이야.

Q. 네가 만들고 싶은 연극은 어떤 건데?

A. 사실 연출가로서 나의 색깔을 완전히 찾은 건 아냐. 그 색깔을 벌써 찾았다고 한다면, 사실 그 말은 나를 속이는 거짓말이겠지. 사실 나도 내가 어떤 연극을 만들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다만, 학교에 다니는 동안은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파. 많은 교수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시기도 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실험’은 정말로 예술학도의 의무야. 다양한 연극을 경험하고 직접 만들어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나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어떤 연극을 만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연극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최근에 중간 결론을 내렸어. 예술의전당에서 했던 퓰리처상 사진전을 보러 갔었거든. 입구에 적힌 문구에 힌트가 나와 있었지. ‘당신을 웃게 하거나, 울게 하거나, 가슴 아프게 한다면 제대로 된 사진이다.’, ‘가장 훌륭한 사진은 네 마음과 가슴이 거기 있을 때 나온다.’ 이런 말들을 봤어. 내가 마음과 가슴을 다해 즐기며 만든다면 그 공연이 관객들의 마음과 가슴을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녀의 작품을 기다린다

현재진행형인 그녀의 중간 결론은 이렇다. 연극은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라는 것. 남한테 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수많은 모든 경험들을 다 스스로 해보겠단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살겠다한다.

앙드레김의 별세를 언론을 통해 지켜보며 자신이 죽을 때가 가까워오면 내 분야에서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이 되어있을지, 혹은 평가받는 위치에 서기나 할 수 있을지 생각을 거듭했다는 그녀. 개인적으로 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 좋은 연출이 되기 위해 연기를 알아야겠다 싶어, 연기 이론서를 뒤지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손짓, 발짓, 몸짓, 직접 연기까지 해보는 그녀의 열정을 알고 나면 그녀의 작품을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