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군.

경제학과 3학년으로 영업맨을 꿈꾸던 K군. 모 대기업 인턴기회에 지원서를 작성하려 컴퓨터 앞에 앉았다. 1~2년씩 열심히 활동했던 동아리는 단 한 줄의 활동 내역으로 끝이 나고, 해외여행 경험은 쓰는 난도 없었다. 결국, 이력서에 써 넣은 건 그다지 높지 않은 어학성적과 동아리 경험뿐이었다. 물론 그는 서류통과조차 하지 못했고, 자신의 스펙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여러 외부활동 기회에 적극 지원서를 내밀기 시작했다. 봉사활동부터 국토 대장정, 해외봉사, 인턴십, 마케터까지 보이는 기회마다 지원서를 들이밀었다.

각각의 사이트에 맞게 이력서와 자소서를 고쳐 쓰는데 투자한 시간만 기본 두 세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서류전형에서 떨어졌다. 스펙을 쌓기 위한 스펙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서류전형조차 없어서 지원하는 이는 모두 할 수 있는 자원봉사부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이 몇 개 쌓이자 겨우 모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봉사활동에 서류라도 합격할 수 있었다.


M양.

통번역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그녀는 이력서에 외부활동 내역을 다 쓰기 어려울 정도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쌓아 온 봉사활동 내력은 대학교에 들어와서까지 계속되었고, 미국에서 주관하는 세계 청소년 인권토론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특히 봉사/리더십 부분으로 각종 기업과 단체, 국가로부터 상을 받기도 하였다.

각종 스펙이 쌓이다보니 그녀는 스펙 쌓기에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이미 서류심사와 면접이 다 끝난 상태였던 통역봉사 기회에서도 따로 연락이 와서 바로 투입될 수 있을 정도였다. 스펙이 스펙을 부른다는 말을 인정한다는 그녀는 현재에도 다양한 활동 기회를 손쉽게 접하고 있다.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경쟁이 치열해진 구직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학생들은 스펙 쌓기에 열중하게 되었다. 수많은 지원자들을 세세하게 판별할 수 없는 회사입장에서도 스펙은 하나의 잣대로서 큰 역할을 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스펙 자체에 대한 경쟁 또한 치열해지고 있다. 단순한 봉사활동 하나에 참여하려 해도 서류전형부터 면접까지 통과해야 한다.

M양은 만약 자신에게 스펙이 없었다면 “일단 자신감이 없어질 거라 생각해요. 사실 이런 활동을 많이 하다보면 면접을 하도 많이 봐서 익숙하거든요. 안 떨린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처음 면접을 보는 사람보다는 확실히 심적 부담이 덜하죠.”라며 스펙이 주는 자신감이 합격요인을 결정짓는다고 말했다.

또한, “스펙은 만들어가는 거지만, 스펙이 있어서 더 많은 스펙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모든 활동에서 서류를 낼 때 스펙을 보니까요. 스펙을 갖추고 있으면 없는 지원자에 비해서 당연히 경쟁력이 있는 거겠죠.“ 라고 언급했다.

이처럼, 스펙이 스펙을 낳는 현상 때문에 첫 외부활동에 도전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진입장벽을 느끼게 된다. 1학년이나 2학년 때부터 시작해놓지 않으면 3학년이나 4학년이 되어서는 새롭게 시작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펙 쌓기 노하우 관련서적’들에서도 1학년 때부터 자신의 꿈을 정하고 미리 스펙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언하는 것 또한 스펙의 생물적인 자기번식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1학년부터 자신의 꿈을 확실하게 정하고 취업을 준비하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과연 20세가 되자마자 취업준비차원에서 인생을 설계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경쟁사회. 빈부격차. 그리고 양극화

스펙으로 학생들의 잠재력을 획일화시켜 평가한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스펙을 쌓는 기회조차 양극화되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모든 분야에서 얼마나 경쟁이 치열해졌는지 알 수 있다.

취업의 문이 좁아지고,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기회마저 양극화되면서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양극화는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취업을 통해 경제적인 상승을 노릴 수 있었던 예전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입시준비도 취업준비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적 풍요가 다시 경제적 풍요를 낳아 빈부격차가 커지고 계층 간 탄력성은 줄어드는 것이다.

각종 자격증 준비에 소요되는 금전적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토익 시험만 해도 40000원 가까이 되는 비용을 들여야 하고, 오픽은 10만원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어학 점수를 기본으로 다른 외부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결국, 자격증과 어학점수를 획득하기 위해 투자하는 비용들은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외부활동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것 또한 매우 힘들다. 등록금에 한 푼이라도 보태려는 학생들에게는 먼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를 희생할 선택기회조차 없다. 취업 준비에 기본적으로 올인(all-in)해도 모자를 판에 한 학기 등록금 마련을 위해 취업에는 신경도 못 쓰는 학생들이 많기 때문이다.

스펙의 양극화는 외부활동의 첫 테이프를 언제 어떻게 끊는가에 따라 기회가 제한되기도 하지만, 경제적인 풍요여부에 따라 양극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결국 사회 내의 계층 간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고 최상위층과 최하위층의 격차는 극도로 벌어져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거리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책은 무엇일까??

요즘에는 기업들 사이에서 스펙보다는 자소서를 중심으로 보겠다는 풍토가 늘어나고 있다. 어학점수가 높다고 해서 스피킹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한자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한자를 읽을 줄 아는 것도 아닌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력서에는 채워야 할 공란이 너무나 많고, 깨끗하게 비워서 내기에는 떨어질 것 같은 압박감이 너무 심하다.

기업들은 인재마련을 위해서라도,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을 위한 장학생 정책을 늘려 사람에게 투자를 하고 독자적인 인재 채용 시스템을 개발해 획일화된 스펙 채우기를 미연에 방지해야 할 것이다. 각각의 회사에 맞는 인재를 맞춤 채용할 수만 있다면, 기업간 이직률을 낮추고 신입사원을 재교육하는 데 드는 비용 또한 절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인재의 좋고 나쁨은 학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갖고 있는 잠재능력에 있다. 앞으로 다가올 개성의 시대, 창조의 시대에는 나름대로 끼가 있는 개성파를 찾아내서 숨겨진 능력을 활용해야 한다. 창조의 시대에는 뭔가 튀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천재와 우수인재를 확보하고 집단화해서 소프트를 개발하는 것이 인재를 채용하고 활용하는 핵심이다." (95년2월25일,일간지 인터뷰) 

이건희가 중시한 개개인의 잠재능력은 스펙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재채용이란 스펙으로 획일화시켜 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잠재능력을 밝혀내고 키워주는 것이다. 나라에 인재가 많고 인재가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완성되어 있을 때 그 나라는 더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20대 구직자가 바라는 시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