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뜩이나 추운 겨울날, 대학생들은 마음에 상처 하나씩을 보탠다. 어떤 교수님은 종강 선물로, 또 어떤 교수님은 크리스마스, 또 새해 선물로 알파벳 하나씩을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차갑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의 시간, 3달이 넘는 시간이 쉽게 평가를 당한다. 누군가는 ‘4점대의 승리자’가 되고 또 누군가는 ‘2점대 인간’이 되고 혹은 학사경고를 받기도 하는 가운데 또 다음번의 힘겨운 싸움을 준비해야만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어떠한 성적을 받느냐가 얼마나 지식적인 성장을 경험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대부분 이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A를 받았는데 이 과목을 수강한 나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전혀 실감할 수 없을 때, 별 노력을 하지 않고 시험 전에 슬쩍 족보만 보고 시험을 보았을 뿐인데 좋은 성적을 받을 때가 분명히 있다. 반대로 학기 내내 교수님이 말씀 한 마디, 텍스트 한 줄로 인해 정말 많은 생각과 고뇌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수강을 해야 할만큼 처참한 성적이 나올 때도 분명히 있다.




성적평가의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상대평가라는 제도적 현실 속에서 많은 교수들은 ‘객관적’으로 학생들의 성취도를 분류하기 위한 기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학생들도 그러한 평가방식을 원한다. 결국 학생들을 ‘줄 세우는’ 기준은 약술형이나 논술형 시험이라도 어느 정도 정해진 ‘답’이 있는 시험 성적이 될 수밖에 없다. 좋은 학점을 원하는 학생들은 교수님의 출제 경향, 족보 등을 참고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공부해서 학점을 받아낸다.

학점을 잘 받는 학생들의 특징은 엉뚱한 맥락에서 ‘이게 왜 그럴까’로 인해 헤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본적인 수업 구조에 대한 이해와 ‘시험에 나올 문제’들을 위주로 공부하는 영민함 같은 것에 있다. 수능이나 내신에도 ‘효율적’인 공부 방법이 있었던 것처럼, 대학 학점 잘 받는 것에도 사실상 왕도가 있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공정한’ 제도 하에서 많은 학생들의 학문적 궁금증과 상상력이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제학 개론 강의를 듣는 학생이 경제학의 기본 가정들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이에 대해 스스로 검증해 보려고 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지만,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는 공식들을 암기하고 이해하는 편이 훨씬 유리한 일이다. 따라서 ‘높은 학점을 받아 취업에 유리하다’라는 이데올로기가 만연한 현재 대학 사회에서는 대학 본연의 기능인 학문 탐구의 기능이 상당 부분 상실될 수밖에 없다. 끔찍한 일이다.

그렇다면 학점을 통해 수강생들을 A, B, C, D, F로 구분하는 일은 왜 필요한 것일까. 물론 학생들에게 학습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시험’이 필요하다는 것은 동의한다. 하지만 굳이 학생들의 성취도를 분류해서 학생들을 줄 세우는 것에는 사실상 자본주의의 끔찍한 이데올로기가 내재되어 있다. 교육사회학에서는 교육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로 인적 자원들을 분류하여 사회에 배치시키는 것, 즉 '선발 및 분배'의 기능을 꼽는다. 수능을 통해 줄 세워진 학생들이 자신의 점수에 맞춰 학벌 체계 안으로 편입되듯이, 대학에서 다시 한 번 경쟁을 통해 걸러진 학생들이 그 점수에 맞춰 사회 체계 안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어떠한 이유로 ‘좋은 학점’을 받으려고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어떻든 간에, 학점이 높으면 결국 졸업 후에 조금이라도 사회적으로 상위 계층에 해당하는 계층으로 편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을 할 때도 좀 더 좋은 대학원에 갈 수 있고, 취업에 있어서도 유리한 조건에 놓인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대학생들이 지금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학문 탐구를 하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무리한 바람일 뿐이다. 학점은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적은 시간을 투여하여 높은 성과를 얻어야 하는 것이고 그 이외의 시간엔 토익, 자격증, 인턴, 봉사활동 등 또 다른 많은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어떻게 ‘공부’를 할 생각을 하겠는가.




문제는 학점이라는 계량화된 수치가 정말로 개인의 능력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지표가 될 수 있냐는 것이다. 물론 4년간의 누적된 학점은 한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성실하게 학점을 받기 위해 노력해 왔는가를 볼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는 동안에 학점이 많이 낮아도 정말 ‘똑똑한’ 친구들을 많이 보았고, 학점은 좀 높을지 모르지만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친구들 또한 많이 보아왔다. (이 점은 수학능력시험 당시에도 마찬가지. 공부를 잘 한다고 해서 인성이 높거나 성실성 같은 다른 품성까지 모두 좋은 것은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비례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학점을 통해 대학생들을 구분하는 것은 결국 그것이 정확한 지표여서가 아니라 단순히 ‘편리한’ 지표이기 때문이 아닐까.

대학원생, 신입사원을 선발할 때 대학원, 기업들이 참고할 수 있는 지표 중에 학점 말고 무엇이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학원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인재가 가지고 있는 학문 탐구에 대한 열의는 단순히 학점이 얼마나 높은지가 아니라, 어떠한 과목을 수강해왔는지 그리고 그가 지금 어떠한 말을 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는지에 담겨 있다. 기업이 뽑는 신입사원의 능력 역시 학점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방법인 학점, 사실은 그것이 가장 공정하지 않은 방법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학점이 개인의 ‘업무 능력’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사실은 사실 기업들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기업들은 요즘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할 줄 아는 게 없다며 투덜대며, 대학의 커리큘럼을 실무 위주로 바꿀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정말 도가 지나치다. 언제부터 대학이 기업을 위한 인력 양성소가 되었나. 기업이 대학의 커리큘럼에 손을 대려고 하고, 학점을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일은 오히려 그들이 책임져야 할, 인력 선발 비용과 사원 교육비용을 대학과 사회, 개인에게 떠넘기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이 학문 탐구라는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고, 사회에 인문학적인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기관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성적평가제도의 개선을 통해 학생들이 구조적으로 학점 경쟁, 스펙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현실을 뒤집어야 한다. 지식 탐구에 대한 그의 진정성, 그로 인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한 사람’의 성취를 평가하는 것은 Pass / Fail 정도의 구분이면 족하지 않겠나. 모든 학생들이 Pass를 받을 수 있는 ‘널널한’ 제도가 아니라, 교수의 냉철한 판단에 의해 단순히 학점만 따려는 학생들에게는 과감히 Fail을 날릴 수 있는 ‘빡빡한’ 제도로써 말이다. 엄격한 Pass / Fail 판단을 통해 학점을 쌓아나간다면, 모든 학생들이'일정 정도 이상의'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