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가산점 도입과 병사들의 슬픈 자화상


  군 가산점제가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올랐다. 1961년부터 1999년까지 군 복무에 대한 보상차원으로 존재했던 군 가산점 제도는 위헌으로 판정받으며 폐지된바 있다. 3~5%의 가산점이 지나치게 높아 여성과 장애인을 비롯한 미필자들을 차별하는 요인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징병제 하에 강제로 끌려가는 남성들이 있는 한 불씨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불씨를 잠재우기 위해 국방부는 군 가산점이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이미 2008년에 군 가산점 재도입이 포함된 '병역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국회 국방위를 통과했으며, 해당 법안은 현재 법사위에 계류 중에 있다. 국방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군 가산점 제도의 부활을 단기 국방개혁 과제 중 하나로 선정해 공론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군 가산점제는 군 복무에 대한 피해의식과 불만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세금 및 건강보험 할 일 적용, 제대군인 취업지원센터 운영, 학자금 저금리 대출, 국민연금 군의무 복무기간 반영 등 군 가산점제 대안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돈’이 필요하다. 반면 군 가산점제는 점수로 인정해주는 방식이다. 다른 비용이 소모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게다가 혜택을 받는 건 극소수의 예비역들임에도 불구하고 혜택을 받지 않는 이들을 제외하면서도 생색까지 낼 수 있다. 보상하는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의 방법인 셈이다. 국방부가 군 가산점제처럼 저비용 고효율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제치고 다른 대안을 내놓을 리 만무한 이유이다.

  국방부 장관과 장성들에게 장병들의 국 복무를 보상하려는 의지는 없어 보이는 이유이다. 그들에게 강한 의지가 있었다면 논란이 분분한 군 가산점제 대신 다른 대안을 생각했을 것이다. 예산에서도 더 많은 부분을 할당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군 가산점제의 재도입을 주장할까? 국방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해왔던 말과 행동들을 보면 분명한 이유가 보인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피격 당시 군 수뇌부는 ‘군 기강 해이’를 원인으로 지적하고 ‘전투형 군대의 육성’이라는 대안을 내놓았다. 전투에서의 패배가 하급부대만의 잘못이며 강한 훈련을 통해 하급부대를 전투에 능숙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마치 안보 위기가 병사들의 탓이고 병사들이 강해지면 극복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군 수뇌부가 병사들에게 지우는 짐만큼 그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2011년 국방 예산은 전년 대비 6.2p 늘어난 31조 4031억 원이다. 규모로 따지면 보건복지노동, 일방공공행정 예산에 이어 세 번째를 차지한다. 물론 관련 당국은 장병들의 복지 예산 또한 증대됐다는 핑계를 댄다. 대표적으로 사병들의 월급이 5%p 정도 인상됐다. 그러나 사병 월급은 2009년과 2010년 2년 동안 동결됐으므로 이정도 증가폭은 생색내기에 불과하는 지적이 따른다. 또한 방위력개선비와 전력유지비가 각각 9.4p, 8.4p 상승한데 반해 병력운영비는 4.2%p 상승하는데 그쳤다. 결국 국방예산의 더 많은 부분이 값비싼 무기를 사는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올해 K-9 자주포와 F15K를 구매하는데 1조 4천억을 책정한 바 있다.

  보상 없이 책임을 지우는 일은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물론 군대에서의 반발은 집단적인 단합이나 외적인 표출로 나타나지 않는다. 군법으로 집단행동과 문제가 될 수 있는 언행을 금지해놓고 있는 탓이다. 사회라면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을 모아서 시위도 해보고, 공론장에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며 그것도 안 되면 포기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군대 안에서는 이 모든 방법이 불가능하다. 그래도 본능적인 욕구를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가 아닌 일에 어떻게든 반응을 보인다. 군인은 반발의 자유도 포기의 자유도 부정당하기 때문에 그 반응은 병사들은 탈영하거나 자살이라는 슬픈 길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 여기에는 병사 개인이 몸과 정신이 약해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필립 짐바르도는 자신의 저서 『루시퍼이펙트』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텐퍼드 모의 교도소에서 실시한 35년간의 실험에서 ‘왜 선량했던 시민이 포로를 학대하고, 존경받는 군인이 민간인을 살해할까?, 그것이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죄의식 없이 동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해답을 얻는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사실 모범적인 이들이었으며 이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건 그들을 둘러 싼 구조(환경)였다. 파우스트를 유혹한 악마는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라 신과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파우스트의 마음속에 들어간 것이다. 악마에게 유혹당한 파우스트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결국 자살하지 않았는가? 나쁜 일을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은 부대 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일들을 병사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병사가 탈영하거나 자살했을 때 그들은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분명하다. 그들은 군의 본질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채 다른 병사들에게서 죄를 찾기에 바쁜 모습이다. 지난 달 30일 육군 모 사단에서 일어난 자살사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군 관계자는 “정확한 자살 동기와 부대 내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밝히기 위해 조사하고 있다”면서 “현재까지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다소 부적절한 언행은 있었으나 심각한 가혹행위나 구타, 따돌리기 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을 뿐이다. 군에 진짜 문제가 있다는 건 전혀 생각 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상시적으로 군의 인사·회계까지 감시할 수 있는 국방감독관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지만 이조차도 외면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군가산점이 현역 복무를 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보상이 될까? 오히려 또 다른 책임을 지우는 족쇄가 되지나 않을까? 현재 정부와 군 수뇌부에게는 군 복부를 보상하려는 의지나 방안이 없다. 하지만 군 내부에서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군 가산점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우리가 군 수뇌부의 일원이라면,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너희들은 군 가산점을 받으니까 행복한 거라고. 이전 10년 동안 복무했던 이들은 아무 혜택도 받지 못했다고. 그러니까 불평불만 하지 말고 시키는 거나 잘하라고. 모두가 가산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국가고시에 응시하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군 가산점의 부활은 병사에게 책임을 지우는 일을 정당화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만드는 족쇄일 수 있다. 이런 ‘부당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그런 의도가 없더라도 군이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악마’를 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