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리플리가 월화드라마 시청률 1위를 수성하며 막을 내렸다. 시청률만 놓고 보면 경쟁 프로그램들을 이겼으니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미스리플리는 방영 내내 비판에 시달렸다. 예쁜 얼굴로 거짓말을 일삼는 주인공, 순진무구한 재벌 2세, 효도와 사랑을 분간하지 못하는 중년의 남성, 착해 빠진 주인공의 친구로 이루어진 비현실적인 인물 구성과 부실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극 전개방식 때문에 수없이 많은 비난을 화살을 맞았다. 종영되기 얼마 전에는 ‘주인공이 거짓말하는 이유를 구조적인 부분이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했다’는 비판이 포털사이트 메인에 오르기도 했다.

지금까지 나온 비판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 드라마에 접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기존의 비평들은 예쁘고 다정다감하다는 이유로(혹은 그렇게 조작된) 장미리(이다해 분)에게 장명훈(김승우 분)과 송유현(박유천 분)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넘어 갈 수 있느냐를 지적해왔다. 드라마가 매 회 끝날 때마다 이런 종류의 분석들은 차고 넘칠 정도였다. 그러나 장미리가 장명훈과 송유현을 유혹하기 위해 꾸미고 거짓말을 하는 것,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 이는 드물었다.

 

장미리는 잘 하는 건 거짓말뿐인가

극 중 장미리는 돈도 없고 출신도 비천했으며 대학도 나오지 못했다. 그는 거짓말로 이 모든 것들을 숨긴다. 또한 뛰어난 외모로 홍보물의 표지모델로 발탁되고 방송에 출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장명훈의 도움도 있었으니 승승장구하는 건 당연한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성공담은 장미리에게 ‘능력’과 기본적인 ‘소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장미리가 우연찮게 장명훈을 만나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연’을 빼보자. 그는 자신이 일하는 호텔의 위기를 재치와 기지를 통해 기회로 바꿨다. 또한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만나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설령 그게 픽션 속 거짓이라 해도 말이다. 다른 누군가가 외모와 거짓말이라는 조건을 갖추더라도 장미리만큼 해내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잃어버린 여성의 주체성

그러나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했던 장미리는 드라마 중반부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불우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동일까. 세상에 자신의 얼굴을 알리고 부총지배인으로 승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부와 능력을 가진 장명훈과 송유현에게 향한다. 이 시점에서 드라마의 포커스는 장미리 개인이 아닌 사랑을 둘러 싼 세 남녀의 갈등에 집중된다. 그 결과 장미리는 더 이상 개인의 영달이 아닌 장명훈과 송유현의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거짓말을 하는 ‘여성’이 돼버렸다. 그는 두남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였다. 그의 거짓말은 남성을 향하는 여성의 내숭과 가식처럼 표현됐다.

미스리플리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한 여성이 한 남성의 아내로 종속돼야만 할까? 자신의 주체성을 다른 곳에 발휘할 수는 없을까? 장미리의 거짓말이 들통 나지 않았다면 그는 송유현과 결혼했을 테고 장미리 개인이 아닌 재벌 2세의 아내로 남았을 것이다. 홍라희 여사의 이름 앞에 이건희 회장의 아내라는 닉네임이 붙는 것처럼 말이다. 홍라희 여사는 국내 미술계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회장의 아내로서 주목받고 있다. 미스리플리라는 제목은 거짓말을 계속 하다 결국은 그 속에 살게 되는 리플리증후군과 아가씨를 뜻하는 여성을 뜻하는 미스를 합친 단어이다. 그러나 남성에게 종속되는 순간 미스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미세스리플리가 되는 것이다. 기획의도가 진부한 로맨스에 있었다면 미스리플리보단 미세스리플리가 더 적절한 제목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제목에 부합하는 드라마를 만들고자 했다면 식상한 삼각관계보다는 장미리 개인에게 포커스를 맞춰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거짓에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을 받았을지언정 지금처럼 이도저도 아닌 작품으로 남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미스리플리가 악평에 시달리는 이유다. 본래 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잃어버린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당신의 주체성을 말하라

“예쁜 구두를 신고, 짙은 화장을 하고, 혹시 네가 돌아올까 봐, 혹시 네가 흔들릴까봐.”

씨야가 부른 <구두>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이다. 예쁜 구두를 신고 짙은 화장을 하는 건 떠나간 남자가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런 의미를 담은 노래 가사들은 여성이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치장을 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통념을 거부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지난 23일에 일어났던 슬럿워크(Slut Walk)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짧은 옷을 입는 이유는 ‘너희(남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개성을, 주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 장미리와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미스리플리의 포커스가 바뀐 것에 의문을 표현한 이들이 드물었다는 건 아쉽운 대목이다. 너무 진부해서 의식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아직 그 같은 사회적 통념이 우리안에 남아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