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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락의자에 앉아 태평양을 건너는 그 은밀하고 희열에 찬 도주에 대하여 -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이란 과거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공직자들에게 주어졌던 유급 독서 휴가다. 오늘날엔 있을 수 없는 휴가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김경씨는 평소 휴가철에도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집에서 거의 자연에 가까운 옷차림(토플리스 차림)에 스스로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을 즐긴다. 그러던 중 그녀는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를 읽고 ‘우연이란 존재가 눈감아줄 때 겨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이에 축복과 같은 1년이나 되는 휴가를 받아 여행 가방을 싸게 된다. 그녀의 목적지는 바로 그녀가 평소에 읽어왔던 수많은 책들의 배경이다.


여기서 잠깐,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휴가는 어떠했는가? 산으로, 바다로 떠난 이번 휴가에 만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가? 수많은 인파와 교통체증에 온갖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여름에는 꼭 한번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의무감이 당신의 마음속에 한 구석을 무겁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감이 불필요하고 낭비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여름이 되면 꽉 막힌 고속도로로 떠나야만 하는 굴레에 벗어나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당신의 휴가는 하나의 스타일로 고착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휴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배낭여행을 포함한 해외로 떠나는 여행도 마찬가지다. 해외로 떠난 당신은 인터넷에 나온, 여행지 책에 소개되어 있는 지정된 장소로 자연스레 향하게 된다. ‘오 영국에 왔으니 무조건 빅밴을 보자. 여기가 그렇게 멋있다며?’ ‘오늘은 루브르 박물관을 꼭 들러서 그림 몇 점을 보고 말겠어.’ 같이 여러 매체에서 접한 유명 관광지는 여행계획표의 한 줄을 꼭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유명장소를 기억 속에 담은 후에는 가볍게 인증 샷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생각해보자. 우리의 지난 여행들이 너무 피상적이지 않았는지, 뻔하지 않았는지. 이에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지은이 김경씨의 여행은 예사 여행과는 다르다. 그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그림 한 점을 봤다고 파리를 경험했다고 말하지 않으며 버스에서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는 피상적 여행을 혐오한다. 그녀는 누군가 이곳은 꼭 가보라고 말해준다면 다른 귀로 흘린다. 그녀가 가고 싶은, 그녀의 마음의 움직이는 곳으로 가야하니까.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들고양이처럼 말이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무작정 리스본으로 가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고 스페인으로 향하는 그런 여행을 그녀는 사랑한다. 그녀는 누구나 다 아는 유명 관광지를 피해 오히려 현지인이 아니고서는 알기 힘든 골목으로 찾아 들어간다. 그리고 어둑한 골목 안 깜박이는 간판 아래 허름한 바(Bar)에 들어가 마음껏 취하기도 한다.

얼핏 보면 그녀의 여행은 즉흥적일지 모른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극히 계획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발이 향하는 곳은 모두 그녀가 사랑한 책들에 나온 배경이니까 말이다. 영국에서 시작한 그녀의 여행은 몰타로, 파리로, 바르셀로나로, 세비야로, 리스본으로, 로마로, 취리히로, 부다페스트로, 베를린으로.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두코에 바람난 여자처럼’ 그녀는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항상 책이 함께였고 그 책의 감동도 함께였다. 덕분에 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 그 속에 담긴 수십 권의 책들을 읽은 듯 한 만족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훗날 그녀를 따라 멀리 떠나게 된다면 그녀가 읽었던 책들을 읽어보고 비행기에 오르면 어떨까 감히 조언한다. 참고로 잡지사 기자여서 그런지 그녀의 문장은 거침없으며 위트와 센스가 넘친다. 그러기에 일반인이 지은 여행기보다 훨씬 생생하고 작은 사건에도 유쾌하다. 개인적으로 식상한 내용의 여행기가 아닌 한 편의 작은 코발트블루 빛의 잔잔한 영화를 본 것 같아 내심 가슴이 떨렸다고 고백하겠다.


여행 가이드북에는 없는 추천 장소들. 지은이가 특별히 담았다.



지은이 김경, 그녀가 말하길 여행의 매력은 휴식이나 도피, 혹은 기분 전환이 아니라 사소하고 부차적인 체험에 있다고 한다. 이런 체험으로 그녀는 여행 가이드북에서 벗어나 보다 더 생생한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현실의 틀에 가로막혀 떠나지 못한 이들이 있을까 그녀는 한 가지 방법을 속삭여 준다. 그것을 바로 음악, 책, 영화다. 어떤 면에서 시간으로 구성된 음악과 책, 영화 속에 우리가 헤집고 들어갈 경우 그것들은 우리를 느닷없이 먼 곳으로 데려가고 만다.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들어 올렸다 어느 순간 다시 일상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그것도 항공권 없이, 마치 ‘마법’처럼 말이다.
 
1년 여간 그녀의 여행 이야기가 담긴 ‘셰익스피어 배케이션’. 물론 그녀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닌 여행이 정도(正道)는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여행은 정도(正道)일까?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일단 오늘 밤 책 한권을 준비해 ‘마법’ 부터 맛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