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커피 체인점에 간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아메리카노의 가격은 3,800원. 우유가 들어 있는 라떼를 시킨다면 4,000원이 훌쩍 넘는다. 한참 동안 홀짝홀짝 커피를 들이켜고 나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쪽에 투명한 유리문을 닦고 있는 알바생이 보인다. 문득 생각이 번쩍 든다. 4,000원. ‘아, 이 커피 한 잔이 저 친구의 한 시간짜리 노동이겠지….’

 


한국사회의 전체 임금 근로자 중 33.8%가 비정규직이다. 그 수치는 꾸준히 올라 50%를 넘어설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갈수록 ‘안전한 일

자리’가 사라짐에 따라 사회는 몸살을 앓고 있다. 사측은 최소한의 정규직 직원들 뽑기 위해 애를 쓰는가 하면, 해고된 비정규직들의 노·사간 갈등양상은 더 거칠어졌다. ‘88만 원 세대’라는 말이 낯설게 들리지 않은 지금, 비정규직 문제는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되어버렸다. 

‘4천 원 인생’은 이러한 우리 사회에 깊은 골이 되어버린 ‘비정규직’의 실상을 다뤘다. 기자 4명이 한 달 동안 비정규직을 몸소 체험하고 왔다. 갈빗집 식당 아줌마, 마트에 정육점 매대 아저씨, 가구공장의 외국인 노동자, 용역 공장 청년. 어찌 보면 우리가 주위를 둘러보면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현장 속에서 느낀 가장 값싸지만 절박함을 노동일기로 풀어냈다.

‘4천 원 인생’은 샅샅이 보여준다. 무엇을? 잔인할 정도로 지독한 현실과 싸우는 노동자들의 일상 말이다. 직접 ‘몸으로 때운’ 기자들의 기록은 생생한 고통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 기록에 등장하는 이들은 사회의 ‘특별한’ 약자들이 아니다.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고, 부모가 될 수 있고, 이웃이 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단면에서는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라고 구분할 겨를이 없다. 이곳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4천 원짜리 노동을 할 뿐이었다.


갈빗집 아줌마의 애환: 너희가 말하는 서비스
서비스라는 단어의 어원을 아는가? '서비스(service)'의 어원은 ‘노예’를 의미하는 라틴어 ‘Servus’이다. 갈빗집과 감자탕 식당 아주머니들과 함께 일한 여기자는 식당의 ‘딩동’ 하는 벨소리에 움직이는 자신을 ‘파블로스의 개’와 같다고 표현한다. ‘딩동’ 벨 소리가 울리면 재빠르게 주인에게 달려가고 출입문에 인사 해야하는 ‘serves’처럼 말이다. 한국사회에서 ‘빨리빨리’, ‘손님은 왕’은 지급한 것에 대한 지나친 'Serves 정신'을 유도한다. 서비스는 노예가 아닌 사람이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뿐만이 아니라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많은 만큼 그 고충은 더하다. 사장에게 추가 수당과 부당한 임금에 대해 얘기할 수 없고, 손님들의 성희롱적인 발언도 묵묵히 견뎌내며, 가정에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들은 하루하루가 힘든 끝없는 노동을 한다. 가정을 벗어나 생업전선에 뛰어든 여성들의 고충은 뼈아픈 고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12시간 동안 서서 일하는 마트 정육점 매대 판매원 : “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에서 ‘화이트칼라’, ‘블루칼라’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정규직과 비정규직도 이 잣대를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앉아서 일하는 ‘화이트칼라’가 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고, ‘정신적 노동’을 성실성과 끈기를 나타내는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화이트칼라’에서 일하기를 소망하며 가계소득의 2~30%를 자녀 교육비로 뚝뚝 떼어 놓는다. 이것에 대한 지독한 선망은 교육수준에 따라 차별 대우를 감수해야 한다는 교육적 이데올로기를 양산한다. 기자와 마트의 정육점 매대 판매를 함께해온 20대 청년은 “제가 좀 끈기가 없어요.”라며 이러한 생활이 공부하지 않은 탓이라고 여긴다. 마트에서 12시간 넘게 서서 일하는 것이 성실하지 않고 끈기가 없는 것인가. 그는 왜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일까. 노동자들은 자신의 교육수준에 따라 육체적 노동을 암묵적으로 합리화 시킨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학력’이 계층이동의 수단이 되는 반면, 계층을 정신적으로 묶어놓는 지독한 쇠사슬이 되었다. 

가구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이 빼앗은 제3세계의 권리
이 책은 노동자들의 일상과 함께 사회의 구조적인 측면도 면밀히 파헤쳐 준다. 기자가 함께한 마석가구공단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은 매일 같이 단속을 피해 안에서 문을 잠근다. 하지만 일자리가 부족해지고, 임금 수준이 낮아질 것을 우려한 한국 노동자들의 반발에 정부는 그들을 강력한 ‘단속’으로 대응한다. 흔히 말하는 3D업종을 담당하는 외국인들에게 선진국과 같이 외국인 미등록자들을 위한 사면은 한국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의 일상이 ‘힘들다’라는 단어로 표현된다면 사회는 그저 ‘냉담’ 했던 것이다. 가족을 본국에 두고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한국의 노동자가 되었다. 그들의 ‘부모 될 권리’는 자연스럽게 세계화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무시당했다. 하지만 우리는 비인간적인 시선과 대우로 그들을 ‘불법 사람’으로 대하고 있다. 이제는 꼭 필요한 노동인력이 되버린 외국인 노동자들을 부정당한 대우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한 해결점을 되짚어 봐야 한다. 


용역 공장 청년: 침묵의 일터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작업과정에 대한 과학적 관리에 따라 생산방식을 효율적으로 증진하기 위한 테일러리즘과 포디즘이 등장했다. 마지막 기자가 간 곳은 위와 같은 방식이 적용되는 조립식 공장이었다. 이곳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이 없다. 인력에 상관없이 목표량을 다 맞춰야 일이 끝나기 때문이다. 이들은 생산량에 따라 목표를 달성한 라인이 추가 보너스를 받는다. 따라서 반복된 작업처리와 기계 같은 침묵만이 공장을 가득 메운다. 공장에는 연대의식과 동료의식 같은 것은 없다. 모두 다 하나의 비인격체가 되어 기계같이 일한다. 비단 공장뿐만 아니라 대부분 한국사회의 노동환경은 경쟁을 강조하고, ‘일’이 사람을 만든다. 동료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며 ‘직장’에서의 사회화를 결여시킨다. 비정규직의 적은 임금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소외감일 것이다. 침묵의 일터가 되어버린 노동현장의 어두운 이면이다.


그들을 왜 계속 4천 원에 묶어두십니까
현재까지 발표된 최저 임금은 4,320원이다. 기자들이 함께 체험한 노동자들은 이 정도, 혹은 기껏해야 5천 원이 겨우 넘지 않는 선에서의 임금을 받고 있다. 그들은 4천 원짜리 임금을 받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4천 원짜리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보내고 있다. 이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이 4천 원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노력한 만큼의 돈을 버는 것이 꿈이다. 비정규직은 또 다른 비정규직을 낳는다. 부모가 비정규직이면 자식도 비정규직이 된다. 악순환은 대물림 된다. 이 책을 지은 기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사회의 비정규직 악순환 문제를 해결하는데 1차적 대안이 되길 바란다. 어떠한 통계적 자료와 쓸데없는 탁상공론 대신 실제적인 ‘경험’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비정규직 문제에 더 많은 문제 제기와 대안 마련에 고민해야 한다. 해결되지 않으면 그 화살이 우리에게 또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런 당신의 인생은 얼마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