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철이 시작됐다. 각 대학들에서는 다양한 전형방식들을 소개하느라 바쁘고 거기에 수험생들은 지원전략을 짜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수험생들에게는 전쟁과 다름없는 그런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맘때쯤이면 항상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필자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시에서 특별 관리 학교로 지정될 만큼 공부를 못하던 소위 ‘꼴통학교’였다. 지역주민들에게는 민폐를, 지역 장학사에게는 근심을 주기로 유명했다. 그래도 학교의 희망으로 빛을 내던 학생이 있었으니, 미모도 출중하고 공부도 잘해 모든 학년의 남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았다. 전교 1등을 놓쳐 버린 적이 없고 모의고사 성적표는 항상 최고를 기록했다. 그런 그녀였기에 그녀만큼은 좋은 대학에 떡하니 붙을 줄 알았다. 하지만 모 대학의 성적우수자 전형에 완벽한 내신의 그녀가 떨어지고 말았다. 다른 학교에는 붙겠지 하던 선생님들과 남학생들의 기대는 무더기로 올라온 ‘불합격’통지에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때 필자는 스쳐지나가는 소리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고교등급제 때문인가…….’



"당신의 학교는 몇 등급입니까?"

당신의 학교는 몇 등급이냐는 질문은 대학교의 등급을 묻는 것이 아니다. 대학은 이미 등급이 매겨진지 오래니까. 이 질문이 묻고자 하는 곳은 바로 고등학교. 고등학교에 등급이라니, 고교평준화가 대다수인 대한민국 고등학교에 등급을 묻는다니 무슨 의도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 허나 많은 이들은 알고 있다. 대한민국 고등학교에 보이지 않는 등급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균형인가 차별인가.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던 그녀의 발목을 잡았던 고교등급제의 정체가 도대체 뭘까? 바로 모든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를 대학 입학 결과 또는 수능 성적 등으로 나누어 일렬로 서열화 한 다음, 그 결과를 입시에 반영하여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 한마디로 경쟁사회의 입맛에 쏙 맞는 구도라 이 말이다.

얼마 전, 고려대가 지난 2009학년도 수시모집 때 외고나 비평준화 지역의 명문고의 내신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주는 특별 내신 성적 산출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교등급제를 시행한 고려대. 아마 그들은 단순히 운이 나빠서 걸렸겠거니 하고 넘어갈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더 당당하게 나갈지도 모른다. 왜냐. 이미 다른 대학들도 암암리에 다 고교등급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만의 계산법을 쓰는 데에 그럴만한 이유는 있다. 특목고나 지방의 명문고처럼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모인 경우 상대적으로 일반 고등학교보다 내신 따기가 힘들다. 우수한 학교의 내신1등급과 일반 고등학교의 내신 1등급의 차이는 그만큼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 인재 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인재를 원하는 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사진출처: 한겨레



하지만 이미 특목고나 지방 명문고들은 이미 대입을 위한 입시고등학교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의 말을 빌리자면 외고가 설립 목적인 외국어 특기 인재 양성 대신 명문대 진학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사교육비 팽창의 핵심 원인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특목고나 지방명문고에 보정점수를 주는 것은 특성화 고교가 아닌 대입전문고교를 양성하는 현상을 초래할 것이다. 이럴 경우 대입과 더불어 좋은 등급을 받는 고교를 가기위한 고입경쟁, 어쩌면 중입경쟁까지, 거대한 입시지옥이 순식간에 불타오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대한민국의 어느 학생이든 모두 자신들이 노력한 결과에 따라 대학에 갈 권리가 있다. 그런데 5공 시대에나 있던 연좌제가 부활한 것인가. 학생들의 노력에는 상관없이 그들이 속한 학교나 선배들의 실적에 따라 평가를 받는 것은 심히 거북한 일이다. 억울하게도 고교등급제 아래 대한민국 학생들의 뛰어난 능력들이 무시 받고 가치 절하되고 있다. 이는 교육당국도 잘 알고 있는데, 2009년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이었던 이주호씨가 고교등급제는 위헌적인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고교등급제가 헌법에서 금하고 있는 연좌제를 위배하고 있다는 것을 겨냥한 말인 듯하다. 게다가 전국의 74%가 고교평준화인 사회에 고교 선택권 없이 ‘뺑뺑이’로 강제 배정받는 경우에는 도대체 어떡하라는 말인가? 컴퓨터가 지정해준 곳에 가야만 하는 그런 구조에서 피하고 싶은 학교가 있어도 피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차마 가볍게 웃으며 운명이라고 운운하기엔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기에 답답할 뿐이다.



대학들의 숙제.

로버트 러플린 카이스트 전 총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 난 고교시절 반에서 30등도 안됐다. 그런데 UC버클리 대학에서는 나의 잠재능력을 보고 나를 뽑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나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은 그의 잠재력을 본 대학, UC버클리는 그의 배경이 아닌 그의 능력 만에 집중했고 숨은 그의 능력을 발굴해냈다. 물론 그의 말대로 한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지만 말이다.

현재 대학들은 우수한 인재를 뽑겠다며 계속 고교등급제를 주장하는데, 그들은 지금 그들이 품고 있는 인재들부터 챙겨야 한다. 지난번 대학 4년을 수료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적수준과 재능에 관한 평가가 있었는데 부끄럽게도 그 수준은 세계적으로 중하위권밖에 미치지 못했다. 이는 대만과 인도네시아보다도 낮은 수치였다. 반면 그들이 대학에 진학하기 전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줬다. 2006년 OECD가 총 57개국 40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학업성취도 국제비교 연구결과 PISA에서 한국 고등학생들이 거의 최고에 가까운 성취수준을 달성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결코 한국의 교육구조 때문 만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상당부분 대학의 책임이 크다. 오늘날의 대학들은 지나치게 브랜드화 되어 자기 학교의 순위를 높이기에 급급한 게 현실이다. 언론에서 실시하는 대학평가 항목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겉치레식의 수업들이 즐비하고 있다. 고등교육에 대한 질제고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이다.

우수인재들의 수준을 엄청나게 떨어뜨린 대학들은 입이 열 개라도 모자랄 상황이다. 대학들은 선발보다는 교육의 역할이 크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리 만들어진 인재만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인재들을 길러내는데 주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