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옥탑방, 그곳에는 등이 굽은 아버지(박수영분)와 어딘가 모자란 가짜 삼촌(김영재분) 그리고 완득이(유아인분)가 산다. 세상이 그들에게 내미는 유일한 손길은 수급품 ‘햇반’ 한 박스뿐. 그러나 이것은 위선에 불과하다. 멸시와 냉담. 아마 이것이 그들에게 내민 진짜 손길이었을 것이다. 무섭도록 차가운 손길 속에서 아버지는 시골 5일장을 전전하며 광대 짓을 해야 했다. 삶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모는 세상을 향해 완득이는 그저 힘없는 주먹질로 저항할 뿐이다. 그리고 세상에 선을 긋는다. 늘 혼자다. 그런데 그 선을 넘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동주선생(김윤석분)이다. 완득이에게 사사로이 ‘얌마’라는 호까지 칭해준 사람이다. 동주선생이 완득이를 부르는 주문 “얌마 도완득! 햇반 하나 줘봐!”를 통해 완득이는 비로소 세상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다. 그렇게 완득이는 성장하고 있었다.

바람 잘날 없는 완득이의 청춘, 그리고 우리네의 청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성공했다'가 아닌, '그러니 우리 함께 가자' 손 내미는 영화 완득이. 지금부터 한번 만나보자!

반경 100m 그쯤에서, “청춘, 이 쓰벌놈아!”


  완득이의 옥탑방 반경 100m쯤에는 욕쟁이 아저씨(김상호분)가 산다. 조금만 크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도 “시끄러워 이 쓰벌놈아”, 동주선생이 완득이네 대문을 쿵쿵 두드려도 “완득아 뭐하냐? 얼른 나와! 이 쓰벌놈아” 그는 걸핏하면 창문 밖으로 “이 쓰벌놈아”를 외친다. 그런데 “이 쓰벌놈아”에는 독(毒)이 없다. 누군가를 향한 비난이라기보다는 그저 아저씨가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불만이 가득하지만 그 불만을 오래 삭히지 않는다. 그저 “이 쓰벌놈아”라는 외마디 분노를 외치고, 다시 돌아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것. 이것은 욕쟁이 아저씨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자 영화 전체에서 그려내고 있는 삶의 방식이다.

  사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들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어두운 청춘,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등 어느 하나 유쾌한 소재는 없다. 하지만 영화는 신파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보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을 정도로 유쾌하게 전달하고 있다.

  누군가는 삶을 유쾌함만으로 그려내기에는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다’라고 말할법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덤덤해야 한다. ‘완득이에게 18년만에 찾아온 어머니, 게다가 그 어머니가 필리핀사람이라면?’ 입장 바꿔 생각해봐도 절대 유쾌할 수도, 덤덤해질 수도 없는 상황이다. 고민은 깊어가고 내가 마치 이 세상에 선택받지 못한 사람인마냥 삶의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가. 그저 “아!! 이 쓰벌놈의 청춘!!” 외치며 신세한탄 한번하고 주어진 것을 받아들여야한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다시 삶을 전개해야한다. 그리 심각할 필요 없다. 이것이 바로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반경 50m 그쯤에서, “얌마! 도완득!”


  100m쯤에서 “야! 이 쓰벌놈아”가 들려온다면 반경 50m쯤에는 동주선생이 완득이를 부르는 주문 “얌마! 도완득! 햇반 하나 줘봐!”가 들려온다. 동주선생과 완득이는 교사와 학생 사이다. 그런데 둘의 사이는 좀 별나다. 동주선생은 교사라는 지위를 가지고 문제아 완득이를 가르치지 않는다. 위로부터 아래로 일방적인 전달 따위는 없다. 그도 그저 옆집 옥탑방에 사는 소시민일 뿐이다. 완득이가 정부로부터 받은 수급품인 햇반을 뺏어 먹는 나이든 청춘일 뿐이다. 그는 완득이네를 결코 동정으로도, 그렇다고 냉담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청춘으로서 완득이가 마주 잡을 수 있는 두 손을 내밀뿐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완득이가 서있는 이 자리


  완득이는 킥복싱을 통해 자신의 꿈을 찾아나간다. 그러나 여타 영화들처럼 어려움을 딛고 킥복싱으로 성공하는 청춘의 극적인 성장드라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매번 다른 선수와 스파링에서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질 뿐이다. 하지만 완득이는 어제 스파링에서 졌어도 오늘 다시 일어나 달린다. 싫어도 어쩌겠는가. 눈뜨고 일어나면 해는 그 자리에 다시 떠있는걸. 무심히도 떠있는 해가 아무리 야속해도 “청춘! 이 쓰벌놈아”라 외치며 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완득이는 동주선생과 어깨를 겯고 달리고 있으니 더할 나위없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