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이것이 ‘청춘(靑春)’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만물이 푸른 봄과 같은 나이라니, 청춘이라는 말에는 싱그러움과 설레는 마음이 가득 차있다. 20대가 청춘이라고 불리어 지는 것은 그만큼 젊고, 가능성 있는 좋은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푸르러야 할 청춘들이 맥없이 시들어 가고 있다. 지금의 20대가 어려운 상황을 겪어나가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만 ‘청춘’일 뿐, 실제로는 청춘과는 딴판인 삶을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버렸다. 우리는 스스로를 청춘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기성세대들의 ‘청춘 위로' 열풍

 
기성세대들은 말만 청춘인 지금의 20대가 꽤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언제서 부터인가 청춘을 위로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20대와의 소통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출판계에서의 '청춘 위로' 열풍이 거세다. 이외수 작가의 ‘청춘불패’,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의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그 밖에도 수많은 책들이 “누가 누가 청춘을 잘 위로할 수 있나”를 경쟁하며 출판계에 나오고 있다.

또한 안철수, 박경철의 ‘청춘 콘서트’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으며, ‘안철수 열풍’에도 일조했다. 비단 ‘청춘 콘서트’ 뿐만이 아니라도 20대를 타겟으로 한 ‘멘토링 콘서트’ ‘토크 콘서트’ ‘3인 3색 콘서트’ 등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주로 유명 인사를 초대해서 그들의 삶과 철학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말에 20대들이 공감을 하고 힘을 얻는 식의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기성세대들의 위로의 손길에 20대들은 많은 힘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까지 “경쟁에서 무조건 이겨라”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된다.” 등의 강압적인 말만 들어왔던 20대들은 따뜻한 위로를 해주고, “꿈을 향해 나가라”는 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고마울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들의 ‘꿈을 이룬 성공담’은 20대들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기성세대들의 ‘청춘 위로’가 청춘을 청춘답게 살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덮으면, 또는 ‘청춘 콘서트’를 갔다 오고 나면 다시 엄혹한 현실이다. 현실에서의 조건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고, 어제의 위로와 격려는, 당장 오늘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청춘은 정말 미성숙한가?

 
기성세대들의 위로를 들어보면 '청춘'이라는 말에 이미 “청춘은 미성숙하다.”는 전제를 깔아놓는다. “나도 젊을 때는 힘들었다.” “지금은 경험이 없고 어리기 때문에 힘들지만, 나이 먹으면서 경험을 쌓으면 좋아질 거다.”는 식으로, 우리가 미성숙하고 어리기 때문에 지금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한국의 청춘들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조언해서 도와줘야 하는 존재인 것 같다.

그러나 현재 청춘들이 겪는 문제가 아직 미성숙하기 때문에 즉, ‘청춘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면 처음부터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청춘의 특수성과는 별개로, 잔인한 사회 구조가 현재의 청춘들을 억누르고 있고, 그 구조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화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근본적인 청춘들의 문제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왜 청춘이 아픈가?’를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청춘이라는 말은 정작 청춘들이 사회에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희석시켜버린다. 청춘이라는 말에 전제되어있는 ‘미성숙함’이 ‘가능성’이라는 말로 좋게 포장될 때 청춘들은 현재 대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개인적인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기성세대가 규정하는 ‘청춘’은 “(지금은 미성숙하지만) 열정을 갖고 노력하면 성공하는 청춘”이다. 가능성이 많은 나이니까, 꿈을 가지고 지금의 고통을 견뎌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열정을 갖고 노력해도 성공을 못 하니까 문제다. 등록금을 벌다가 냉동 창고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황승원 학우나, 능력에 따른 대우를 제대로 못 받아, 가난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난 최고은 작가를 보라. 우리 사회가 청춘들이 열정을 갖고 노력한다고 해서, 꿈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일까?



청춘이 말 그대로의 ‘靑春’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청춘' 언론, 고함20

우리 청춘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 여하를 따지기 보다는,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먼저다. 최소한 경쟁이 불평등하지 않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제공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점과, 그에 따른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사회적 변화는 앞으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나갈 20대가 스스로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청춘들이 미성숙하고 불완전하다는 전제를 깔아놓는 기성세대의 ‘청춘관’을 거부하지 않는 한, 우리는 변화의 주체가 설 수 없을 것이다.

봄은 봄 자체로 아름답다. 여름처럼 잎이 무성하거나, 가을처럼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해서 미완성된 시기가 아니다. 그런데 정작 청춘이라는 말이 우리를 미완의 ‘주체’로 만들고 있다. 20대가 청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오히려 20대가 올곧이 하나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을 막는다면, 나는 청춘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싶다.
 
기성세대들은 우리 세대에게 그럴듯한 희망의 메시지는 던질 수 있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줄 수 없다. 우리 스스로 20대가 충분히 능력 있고 강한 존재라는 자각을 가져야만, 우리를 압박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회 구조를 우리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생긴다. 20대는 '청춘'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변화의 에너지'를 지닌 시기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