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관리는 언어관리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매커니즘으로 설명된다. 한 세력이 특정 쟁점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새롭게 정의 내린다. 그리고 새롭게 정의 내려진 언어가 반복적으로 국민들에게 노출된다. 그 언어가 일상에 슬그머니 자리잡아 가는 사이, 그 언어에 담긴 프레임도 슬며시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진다. 그리하여 언어를 선점하는 사람은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언어 선점을 둘러싼 싸움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단어는 ‘자유’이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그의 저서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에서 진보와 보수는 ‘자유’를 두고 치열하게 프레임 싸움을 벌여왔다고 이야기한다. 자유는 인류의 절대적인 가치로, 그 누구도 쉽사리 부정하기 힘든 것이다. 이 ‘자유’라는 단어를 선점하기 위해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보이지 않는 싸움이 존재해왔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대립을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국가 역할, 기업 규제의 범위, 시장 자율성의 확대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민영화’를 둘러싼 논쟁은 ‘자유’를 두고 벌어지는 대표적인 언어 선점의 사례이다. 



민영화, ‘자유’를 두고 벌어지는 언어 선점

 ‘민영화’는 잠잠해지려 하면, 다시금 뛰쳐나와 논란의 여지를 만드는 이슈 중 하나다. 현재도 민영화와 관련된 여러 현안이 사회 이슈로 떠오른 상태이다. ‘인천공항 민영화’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완결되지 않았으며, ‘한미 FTA’를 둘러싸고 의료 민영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렇게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민영화’는 한자어로, “民營化”라고 쓴다. 즉, “국가 및 공공단체가 특정기업에 대해 갖는 법적 소유권을 주식 매각 등의 방법을 통해 민간 부문으로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 글자 뜻 풀이 대로라면, 특정 기관 혹은 기업 경영의 주체가 국가에서 민간으로 변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민영화는 민(民)영화가 아니다. 민영화는 영어로 “Privatization”이다. 어떤 부문이 민영화되면 해당 부문이 공유의 영역에서 사유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즉, 해당 기관을 기업이 사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민영화는 정확히 말해 ‘사영화’이다. 단순히 경영의 주체가 국가에서 민간으로 넘어간다는 이유로 민영화라 부를 수 없다. 기업이 민간 영역에서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民)이라는 포괄적인 글자를 붙이기에 무리가 있다.

 


‘민영화’, 자유의 확장? 자유의 제한!

 이렇듯 단어와 의미 사이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민영화’라는 단어는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득권 세력은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의 귀속’을 민영화라는 단어로 정의하여 프레임을 선점했다. 이렇게 선점된 민영화란 단어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내뿜는다. 국가의 억압과 종속에서 해방되어, 민(백성 민, 民)간의 영역에서 자유가 확대된다는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어감이 사태의 본질을 감추고 미화시킨다.

 하지만,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사실이다. 해당 부문이 기업의 사적인 소유로 이전되는 이상, 기업의 이익창출이 최우선순위가 된다. 따라서 그동안 공공 영역에서 보장받아 왔던 ‘적극적 자유’는 ‘자유’라는 미명 아래 사라지게 된다. 그리하여, 치료받을 자유, 주거를 보장받을 자유, 생계를 이어나갈 자유 등도 함께 사라진다. 이렇게 민영화란 단어가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민영화의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세금 폭탄’이라는 단어는 언어 선점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여 정부 시절, 부동산값이 폭등하자 정부는 세제개혁안을 내 놓았다. 보유세 강화, 양도세 중과, 개발이익 환수를 포함하는 개혁안을 실행함으로써 부동산 가격을 안정화시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투기세력은 세금에 폭탄이라는 단어를 붙여 ‘세금폭탄’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고, 보수언론은 ‘세금폭탄’이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노출시켰다. 본래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세금이란 단어에 폭탄이라는 어휘를 갖다 붙임으로써 그 부정적 이미지를 극대화시킨 것이다.



민영화 대신, 사영화를 사용하자


 “프레임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대중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상식으로 통용되는 것을 바꾸는 것이다. 프레임은 언어로 작동되기 때문에, 새로운 프레임을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요구된다. 다르게 생각하려면 우선 다르게 말해야 된다.”

 조지 레이코프의 말이다. 포장된 껍질을 벗겨 내고,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민영화’ 대신 ‘사영화’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민영화가 곧 사영화임을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민영화라는 단어를 넘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언어의 꼼수를 넘어 사건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의식적으로라도 '민영화' 사용을 줄이고, 적극적으로 '사영화'를 사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관련 사안을 보도할 언론 관련 직종을 가진 이들과 관련 학문을 연구할 학계에서부터 노력을 기울인다면 느리더라도 언젠가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지만 강력하게 제안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