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이지 마라. 돌이킬 수 없다. 놈을 사람이라 생각하지 마라. 놈은 돌멩이다. 나무다 풀이다 미친 당나귀다 개다 염소다. 저것은 그냥 돌멩이일 뿐이다. 돌멩이에서 눈물이 흐르게 해라. 통제력을 잃지 마라. 감정을 들키지 마라. 냉철해야 한다. 흥분하지 마라. 얼음 가면을 써라. 들끓는 피를 차갑게 식혀라. 숨소리조차 감추어라. 땀도 흘리지 마라. 신음소리도 내지 마라. 전쟁이다. 적을 제압하지 않으면 적에게 공격당하는 목숨을 건 싸움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악의 세력이다. 거짓을 일삼고 기만적인 술책과 불법을 감행하는 악의 졸개들이다. 폭력과 투쟁과 전복을 꿈꾸는 악의 폭도들이다. 정돈된 이 세계를 죄악으로 물들일 악의 몸종들이다. 우리는 악의 세력과 싸우는 선의 전사들이다. -천운영, 『생강』 中

30일, ‘민주화의 대부’ 김근태씨가 별세했다. 그에 따라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 목사의 과거 발언이 다시 화제다. “고문은 애국이고, 신문은 하나의 예술이다”라는 발언이다. 그 발언이 화제가 되며 이근안 목사는 다시금 논란의 중심에 섰다. 특히 그 발언이 오래 전 발언이 아니라, 2009년 있었던 인터뷰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반성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근안 목사가 비판의 대상이 되며 다시 주목받는 소설도 있다. 바로 천운영의 『생강』이다. 

『생강』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소설은 생생하다. 처음 6페이지를 고문과정에 할애한다. 옷을 벗기고, 빛을 쪼이고, 몸에 물을 붓고, 고춧가루를 섞고, 때리고, 매달고, 전극을 꽂고, 고통을 감상하는, 고문의 전 과정을 낱낱이 묘사한다. 앞서 인용한 부분 역시 도입부 중 일부다. ‘우리는 악의 세력과 싸우는 선의 전사들이다’의 대목에서 “고문은 애국이다”라는 이근안의 평소 소신이 잘 드러난다.


왜 ‘생강’인가?

생강이란 제목은 낯설다. 누구도 그 제목에서 내용을 유추할 수 없으리만치 내용과 동떨어져 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제목을 정한 이유로, “생강하면 각자 떠올리는 맛과 향과 느낌이 다양하다.”라고 말했다. 소설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에선 더욱 구체적이다. 김치를 먹다가는 피하고 싶어지는, 그러나 차로 끓이면 더없이 향기로운, 앵에서 앙으로 이어지는 어감이 어여쁜, 그런 생강의 이름으로 소설을 쓰고 싶었단다. 생강의 이름처럼 오감이 도는 소설이었으면 좋겠단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단선적이지 않다. 이근안을 다루지만 그를 ‘악’이라고 명확히 규정짓지 않는다. 물론 그를 옹호하지도 않는다. 대신 하나의 시선을 추가한다. 이근안의 딸, ‘선’이다. 그는 순전히 소설을 위해 작가가 창조해 낸 인물이다. 작가는 ‘고문은 예술’이라는 이근안(소설 속에서는 ‘안’으로 등장)과,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모멸감으로 망가져가는 그의 딸 ‘선’을 등장시켜 서사를 이끈다. 

두 중심인물의 구도는 명확하지 않다. 둘은 단순히 아버지와 딸 관계일수도 있다. 역사 속 대죄인과 그 죄인의 단죄를 요구하는 대학생 간의 관계일 수도 있다. 아버지 ‘안’때문에 ‘선’의 모든 삶이 송두리째 날아갔으니,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파악할 수도 있겠다. 구도가 다양하니 소설에서 풍겨 나오는 맛과 향도 다양하다. 이근안의 자기 합리화도, 그에 대한 딸의 혐오도, 인간 본연의 공포도, 비열함도, 때로는 부성애까지도 볼 수 있다. 『생강』이란 제목처럼 다양한 독해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근안 전 경감 출처 : 동아일보

 

아버지가 내 다락방에 숨어들었다

『생강』은 고문기술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 해서 사회적 문제의식을 다룬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인간의 본질, 즉 선과 악에 관한 문제의식을 다룬다. 그 배경은 ‘다락’이다.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 자기밖에 없기에,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할 수 있는 공간. 이근안은 고문 행적이 문제가 되어 쫓길 때, 다락방에서 10년을 넘게 숨어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작가는 그 사실을 좀 더 극적으로 재현한다. 

‘안’의 아내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딸린 방에 ‘안’의 딸, ‘선’이 지낸다. 그리고 원래 ‘선’이 지냈던 다락방은 ‘안’의 것이 된다. 미용실에 들락거리는 손님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함이다. ‘선’의 천장이 ‘안’의 바닥이 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졸지에 대학생 ‘선’은 고문기술자 아버지 ‘안’을 그야말로 ‘등에 지게 된’셈이다. 

‘아버지가 내 다락방에 숨어들었다’는 중의다. ‘다락’을 현실적 공간으로 해석한다면, 실제로 ‘안’의 도피처가 ‘선’의 다락이 되었다는 문장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다락’을 문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선’의 가장 개인적인 공간에 아버지가 침입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새내기가 되어 꿈꿔왔던 낭만을 펼치려던 ‘선’에게 ‘안’의 존재는 분명 침입이다. 그녀는 다락에 머물러 있는 아버지에게 우유와 신문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아버지의 존재를 고백했다가 사랑과 친구, 모든 것을 잃고 급기야 대학마저 그만두어야 했다. 때문에 둘의 갈등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이 갈등을 매우 세심히 그려낸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다락의 아버지와, 아랫방의 딸의 해석은 다르다. 아버지는 이해받고 싶어 하며, 아버지를 증오하는 딸은 끊임없이 아버지를 오해한다. 딸은 남자를 들여 섹스를 하고, 아버지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교성을 듣고 전전긍긍한다. 둘의 갈등 속에, 선악은 없다. ‘안’이 악일망정, 다락으로 숨어든 후 ‘안’의 행동은 ‘악’이라기엔 애처롭기까지 하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밥도 물도 주지 않는 ‘선’의 행동이 ‘악’으로 읽힐 여지도 있다. 『생강』이 ‘고문’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도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는 반성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용서할 수 있을까

‘그 날은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일년을 더 버티다가 드디어 다락방 생활을 마친 날이었다. (중략) 봄이다.’소설의 12장은 이렇게 끝난다. 열아홉 살이었던 ‘선’은 서른 살이 되었고, ‘고문’으로 시작했던 소설은 자수로, ‘봄’으로 끝난다. 그게 원래 이 소설의 결말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탈고 과정에서 13장을 추가한다. ‘선’의 어머니가 ‘안’을 면회하는 장면이다. 

그녀가 전하는 ‘안’의 말은 충격이다. “세상이 바뀌어야지. 이게 어디 정신 제대로 박힌 세상이니? 세금 걷어서 빨갱이 놈들한테 다 갖다 바치는 세상이.”란다. 그는 자수했다. 그러나 자수하지 않았다. 그는 ‘법’앞에 자수했을 뿐 ‘양심’앞에 자수한 것은 아니었다. 김근태씨는 돌아가셨고, 여전히 이근안은 묵묵부답이다. 반성이 없으니 용서도 없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작가가 수정해 넣은 13장은 이근안의 속 심정이 가장 잘 드러난 결말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으며 머리가 복잡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