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은 어떻게?” “대학은 어디로?” 친척어른들의 질문이 껄끄러운 20대

취업준비생 이민정(26·여)씨는 설날이 부담스럽다. 친척어른들이 취업문제나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물어보면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들뿐더러, 그런 질문을 들으면 자기 스스로도 왠지 떳떳하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민정씨는 “다음 명절에는 번듯하게 직장인이 돼서 큰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최은영(25·여)씨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지금 신분이 어중간하다. 졸업 유예를 해놓고 있어서, 학생이라고 하기도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취직을 한 것도 아니다. 친척들이 요즘 근황을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졸업을 앞두고 있거나, 졸업을 했지만 취업을 못한 학생들에게 설날은 기분 좋은 날이 아니다. 극심한 취업난이 명절동안 20대들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해서 축하받고 싶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취업준비생으로 지내는 기간이 장기화된 사람들은, 아예 친척들과의 만남을 피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취업뿐만 아니라, 대학문제 때문에 친척들을 피하고 싶은 20대들도 있다. 편입준비생 강모(26·남)씨는 “어른들의 질문이 껄끄럽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닌데, 자꾸 어른들이 편입 어디로 할 거냐고 물어본다. 이미 좋은 대학을 간 다른 사촌들과 비교되는 부분도 있어서 많이 위축된다.”고 털어놓았다.

작년에 입시를 경험하고 올해 막 20살이 된 입시생들 역시 설날이 불편하게 느껴지긴 마찬가지다. 친척들의 관심사가 온통 ‘자신이 어느 대학에 갔는지’에 쏠려있기 때문이다. 한유일(20·남)씨는 “친구 중에는 입시 실패했다고 아무데도 안 간다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학벌로 사람 평가하는 건 사회나 가족이나 다를 것이 없다. 친척 중에 나보다 입시 잘 본 애가 있으면 굳이 비교를 안 하더라도 괜히 열등감 느끼게 될 것이다. 반면 내가 잘 봤으면 당연히 으쓱할 것이다.”며 설날이 학벌경쟁의 장이 되는 풍경을 꼬집었다.

 

인터넷에서 유행하고 있는 '설날풍경' 만화


이처럼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는 어른들의 질문, 그리고 ‘대학입학’과 ‘취업’이라는 사회적 성취에 대한 가족들 간의 견제심리 때문에, 설날은 20대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날이 되고 있다. 주부 이모(50)씨는 “손자·손녀나 조카뻘의 아이들을 오랜만에 만나다보니 딱히 할 말이 없으신 어르신들이 가장 일반적인 질문을 한답시고, 대학이나 취업여부를 묻게 되는 것 같다. 일부러 아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성에게만 유독 부담되는 날이라 사생활이 보장 안돼서…

설날과 같은 명절에, 여성에게만 과중하게 부여되는 가사노동이 부담스럽다는 지적도 있다. 이소희(21·여)씨는 “‘딸’이기 때문에 가사노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하다. 가족 내에서 착한 딸 역할을 하기 위해, 어머니를 도와 차례 음식을 열심히 만들고 있다. 여성에게 가정은 곧 일터라는 말이, 지금의 딸들에게도 그대로 답습되는 경향이 있다.”며 명절문화의 가부장적인 면을 고쳐야한다고 말했다.

명절행사가 주로 남자의 집안에서, 남자 어른위주로 치러진다는 사실에 대해 서정은(23·여)씨는 “노동력의 원천인 주부는 정작 자신의 가족과 친지를 명절 당일에 만나지 못할뿐더러, 시댁눈치 보느라 즐거운 시간은 고사하고 명절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한 가족구성원의 희생만 요구하는 명절은 싫다.”며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진짜 명절을 맞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절에 대해 특히 여성들의 불만이 많은 것은, 우리나라의 명절이 여성들에게 유난히 부담을 주는 가부장적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주 안보는 친척들과 같이 있다 보니,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박민영(26·여)씨는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라 해도, 서로 성격이 안 맞거나 행동이 마음에 안 들면 반갑지 않다. 또한 게으르게 보일까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일을 돕다보니, 사회생활의 연장선상 같다는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이은정(23·여)씨는 자신의 집이 큰집이여서 친척들이 많이 모이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고 했다. “친척들과 같이 방을 쓰게 되고, 내 방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도 있다. 내 물건 내 공간에 대해 타인이 ‘접근성’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침해받는 기분이 든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데 명절에는 집밖에 나가기도 눈치 보인다.”며 명절에는 사적인 공간이 보호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가족이나 친족과 만나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설날에 대한 인식은 20대 사이에서는 희미해지고 있다. 특히 20대는 핵가족 사회에서 자라난 터라 친척들과 모이면 대체로 낯설어하고,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가끔 만난 친척들이 민감한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하니, 설날과 같은 명절이 반가울 리가 없다.

그리고 여성에게 주로 가사노동의 부담을 떠안기는 상황과, 친척들이 모였을 때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고 어른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등의 명절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20대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명절을 보내는 전(全) 세대가 머리를 맞대고 명절을 부담 없이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으면, 20대가 명절에 갖는 부담감은 더욱 심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