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은 왜? 도대체 왜 세트장을 박차고 나왔을까? 우문이다. 누가 거기서 살고 싶었겠는가. 진짜 세상이 아닌 가짜 세상에서. 그런데 잠깐만 생각해보자. 그 세트장은 진짜나 다름없는 세트장이었다. 배우들이긴 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한 사람이 인생을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실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세트장이라는 이름만 뗀다면 누구나 살고 싶을 만큼 좋아보였다. 조작된 세상이 싫었을 수도 있다. 역시 충분하지 않다. 조작되지 않았더라도 그는 거기서 뛰쳐나오고 싶었을 테니까. 필자는 트루먼이 아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가 탈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관찰’이다. 그는 사방의 몰래카메라로 365일, 24시간 관찰 당했다. 
 
영화를 보며, 누구나 트루먼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가 조금 약해지자 여기저기서 트루먼이 등장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2011년 한해 숱한 화제를 만들어낸 ‘짝’은 한국판 트루먼들이 활동하는 대표적 프로그램이다. 여자 출연자와 남자 출연자가 나와 일주일간 애정촌에서 생활하며 서로의 짝을 찾아 나선다. 사랑을 찾아나서는 남녀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누구는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를 밝히고 누구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모든 장면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모두가 짝을 찾는 행복한 결말은 아니지만, 상관없다. 사람들은 특이한 과거와 자극적인 모습, 무엇보다도 사랑을 구애하는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즐거워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트루먼을 동정했던 그들이 트루먼이 되거나 그런 트루먼들을 보며 즐긴다. 누구도 관찰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도 관찰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사생활을 즐기는 상황이다. 이쯤에서 갑작스레 ‘소셜 미디어’가 생각난다면, 우연일까. 소셜미디어는 사생활을 즐기는 우리 시대상을 제일 잘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서로의 사생활을 공유하고 있다. 내가 오늘 뭐했는지 실시간으로 올리고 사람들은 거기에 댓글을 단다. 거짓말 조금보태서 우리는 누구를 만나지 않아도 소셜미디어 상에서 언제나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한번이라도 소셜 미디어를 해본 사람은 안다. 남을 ‘관찰’하고 자신을 ‘노출’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두들 그 맛에 소셜미디어에 푹 빠져 산다. 눈물 흘리는 모습을 올리는 사람까지 있으니 말 다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잠깐! ‘소셜미디어 시대’는 남의 사생활을 관찰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도구가 자주 쓰이려면 도구에 대한 ‘필요’ 혹은 ‘욕망’, 그리고 그 도구가 사용되기 편한 ‘시대적 맥락’이 존재해야 한다. 사생활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시대적 맥락이 없었다면 ‘소셜미디어’라는 ‘도구’가 이렇게 ‘머스트 아이템’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다. 먼저, 사생활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언제나 존재했다. 고대에도 중세에도 우리는 남 훔쳐보는 것을 좋아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때는 ‘관찰’과 ‘노출’이 사생활의 영역에서만 존재했다. 현대처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범벅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트루먼 쇼가 실제 세계에서 흥행하는 이유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시대적 맥락으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일단, 다시 트루먼 쇼로 돌아가 보자.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미 트루먼 쇼는 ‘관찰’과 ‘노출’이 범람하는 가상세계를 보여줬다. 트루먼 쇼가 세계 제일의 쇼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런 세계 설정에 공감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트루먼 쇼라는 가상의 쇼가 인기를 얻는 것이 전혀 새롭지 않았다. 오히려 기막힌 쇼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소셜미디어의 시대’ 이전에 ‘관찰’과 ‘노출’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알려준다. 
 
무엇이 인간들로 하여금 ‘관찰’과 ‘노출’의 시대로 이끌었을까.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그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되어줄 것이다. 현대 이전엔 인간에게 ‘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만이 존재했다. ‘공적 영역’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고, ‘사적 영역’은 동일한 배경을 가진 가족이나 친구들이 머무는 장소였다. 사람들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엄격하게 나눴다. 이러한 제한은 남에 대한 ‘관찰’과 ‘노출’이 ‘사적 영역’에서만 이뤄지게 한 결정적 요소였다. 그러나 현대로의 발전은 다양한 계급과 신분으로 나뉜 사람들을 하나로 묶으며, ‘민족’이란 개념을 불어넣고 급기야는 ‘사회’를 창출해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분리할 수 없었다. 왜냐면, 분리돼있던 사람들이 하나로 묶였고 그로 인해 탄생한 ‘사회’는 자신의 사생활과 공공의 역할이 혼재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범벅,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은 모두의 것이었고 거꾸로 모든 것은 개인의 사생활과 통했다. 다만, 이들을 연결시켜줄 적절한 ‘도구’가 없었을 뿐. 전보와 전화는 파급력이 없었다. TV는 파급력은 있었지만 쌍방향이 아니었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나서야 그 욕구는 불이 붙었다. ‘트루먼 쇼’가 ‘닷컴버블’이 한창이던 1998년에 나온 것은 그런 점에서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는 모든 것이 ‘준비 완료’인 상황에서 우리의 욕구를 폭발시켰다. 우리는 드디어 거침없이 남을 관찰하고 내보이게 됐다. 


결국, ‘짝’은 똑똑했다.(‘짝’이 ‘소셜미디어’가 폭발하는 시대에 나타난 것도 참으로 절묘하다) 사랑은 가장 사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남의 사생활을 관찰하고 싶은 시청자들의 욕구 그리고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걸 원하는 시청자들의 욕구가 합쳐졌다. ‘짝’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잘’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했다. 물론, 이전에도 이러한 욕구를 파악한 프로그램은 있었다. ‘아찔한 소개팅’, ‘총각 연애하다’,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가 그것이다. 그러나 케이블 프로그램이 자극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춰 황당무계한 미션을 내놨던 것과 달리, ‘짝’은 출연진들을 일주일간 ‘애정촌’에 묵게 했다. 더욱 자연스럽고, 더욱 현실감 있는 행동들이 나왔다. 애정촌을 나와 실제 결혼까지 한 커플들도 있다.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실제였듯, ‘짝’ 출연진들의 사랑도 실제다. 가상이 아닌, 실제의 사생활을 담아내며 ‘짝’은 ‘관찰’과 ‘노출’이 거리낌 없는 시대의 ‘끝판왕’이 됐다.
 
자기 의지로 하는 ‘노출’이다. 그리고 남의 사생활을 ‘관찰’하며 즐거운 것은 당연하다. 뭐 하나 잘못된 점이 없다. ‘짝’을 보며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즐겁다. 그러나 ‘짝’을 보면서 조금 찝찝한 느낌이 든다. 아마, 트루먼의 탈출을 보며 기뻐했던 기억 때문이리라. 우리는 태생적으로 남을 관찰하길 좋아하지만 그만큼 자신만의 사생활을 갖고 싶어 하니 말이다. 트루먼 쇼가 나온 지 14년, 사생활은 더욱더 빠른 속도로 우리 곁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 속도는 우리 시대의 속도이기에 개개인이 어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짝’을 보며 한 번씩은 생각해보자. 과연 우리 사생활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