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입문서로 널리 읽히는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의 모든 권력관계를 전복시킨다. 여자(woman)와 남자(man) 대신, 움(wom)과 맨움(manwom)이라는 단어가 쓰인다. 움은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을 하며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는 권력을 쥐고 있고, 맨움은 움에 의존적이며 약한 존재이며 아이를 기르고 집안일을 하는 역할을 한다. 맨움들은 밋밋한 가슴과 페니스를 부끄러워하며 그것을 숨기기 위해 ‘페호’라는 가리개를 착용하고 다닌다.

이갈리아에서라면 어땠을까. 움들의 비키니 시위가 과연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지금 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들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된다. 비키니 시위가 표현의 자유인지 성 상품화인지, 이를 두고 ‘꼴린다’고 표현하는 남성들이 성희롱을 한 것인지 아닌지 같은 담론들이 과연 어떠한 기반에서 나오고 있느냐는 것이다.

2012년 오늘, 한국 사회의 몇 가지 단면들을 보자. 가수 비가 웃통을 다 벗어젖히고 웨이브를 추는 건 ‘남성미의 상징’쯤으로 여겨지는 데 비해, 여자 아이돌이 춤을 추는 도중에 실수로 속바지라도 살짝 보이는 날엔 그를 향한 온갖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한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성희롱적인 발언과 행동들이 활개를 친다. 내가 몇 년 간 체감해 온 공간인 대학에서도 대상 여성을 목전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성적 농담을 던지는 상황을, ‘여자는 이래야지’하는 식의 성별에 따른 역할 규정을 하는 상황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한국 사회 속에서, 비키니 시위를 하는 여성들은 비키니 차림을 주목을 받는 도구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한국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비키니 시위에 담긴 정치적 의사 표현에 주목하기 이전에 그 도구로 사용된 비키니의 성적인 의미에 먼저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 사회 속에서, 나꼼수와 네티즌들은 여성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는 발언을 해 놓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한국 사회 속에서, 나꼼수의 사과를 요구하는 이들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또 한국 사회 속에서, ‘비키니 시위’는 선정적이고 성을 상품화하는 것이라는 담론이 통용되고 이는 여성들의 행동을, 신체를 제약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비키니 시위가 논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여름철 피서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정도에 왜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유난을 떨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문제가 더 크게 이야기될수록,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부각될 뿐이다. 사회 전반에 녹아들어버린 마초성이라든지, 섹시한 것에 열광하면서 뒤에서는 욕하는 성적인 것에 대한 이중성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