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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든 말이든 모름지기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뜻의 옛말이다. 말 그대로 서울의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팍팍한 서울살이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힘들어한다. 그런 이들을 더 힘들게 하는 요소가 있으니 바로 사투리다. 특히 취업 위해 무작정 상경한 20대들이 가장 많이 부딪치는 벽이기도 하다.
 

“취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죠”

왜 서울말을 배우냐는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이다. 강연가를 꿈꾸는 대학생 조정현(24)씨는 주말마다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취업준비에 한창이다. 그녀는 수도권 학생들이 대부분인 대외활동에서 유일한 대구 사람으로 참여하여 미션이나 강연이 있을 때마다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한 달 기차비만 40만원이 나왔지만 열정이 있어 즐거웠다는 조정현 씨를 괴롭힌 것은 다름 아닌 사투리였다.

“제가 평소에도 말하는 데는 자신 있어서 발표를 도맡아 했거든요. (대외활동에서도) 팀 미션 발표를 할 때 제가 했는데 (서울이다 보니) 내용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사투리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린 적이 많았어요.”라는 그녀는 또한 “같은 내용으로 발표를 해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전문성이 떨어져 보일까봐 걱정되기도 했어요.”라고 말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표준어 정의)’이 아닌 사투리를 사용하면 교양 없고 신빙성이 낮아진다는 이유로 서울말을 배우는 20대가 늘고 있다. 특히 취업이 하늘에 별 따기가 돼버린 지금, 면접에서 서울말은 필수다. 이를 반증하듯 사투리를 교정해주고 표준어를 가르치는 스피치 학원이 성행하고 대학에서는 표준어 강좌가 열리기도 한다. 부경대는 작년 9월부터 재학생들의 취업 역량 강화를 위해 ‘표준어 구사능력 향상 과정’ 강좌를 열었는데 2기 과정은 모집 첫 날 마감되는 등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처럼 표준어는 취업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기 위한 등산화와 같은 존재가 됐다. 좀 더 수월하게 산을 타려면 발에 꼭 맞는 등산화가 필수다. 지방의 취업준비생들은 표준어라는 등산화를 발에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 조선일보


“외국어 배우는 기분이에요.”
사소한 습관하나도 고치기 힘든데 20여년을 사용해온 사투리를 하루아침에 표준어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억양과 말투는 어느 정도 고치더라도 표현 방식까지는 너무 어렵다는 대학생 남태경(24) 씨는 표준어를 배우는 게 꼭 외국어 배우는 기분이라고 했다. “(표준어가) 외국어도 아닌데 사투리와 너무 달라서 고치기가 쉽지 않아요. 대충 듣기에는 서울말을 쓰는 것 같아도 자세히 들어보면 다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니까요.”라는 그녀는 면접을 준비하며 겪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서울에서 하는) 면접 스터디에서 아르바이트 경험을 말하는 게 있었는데 제가 ‘한의원에서 일할 때, 침 맞는 할아버지들이 서슴없이 바지를 벗으셔서 깜짝 놀랐다’는 말을 하자 다들 빵 터지는 거예요. 왜 그런가했더니 서울 애들은 바지를 벗는다고 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는다고 한다며 그렇게 콕 짚어서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 때 말투나 억양뿐만 아니라 표현 방식에서도 표준어와 사투리가 차이 난다는 걸 느꼈어요.”라는 그녀는 그 이후로 표준어를 쓸 때마다 배로 신경 쓰게 됐다고 했다.

같은 대한민국에서 같은 한국말을 쓰는데도 한 번 생각을 하고 말을 해야 하는 모양새는 영어나 중국어를 배우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지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워야 할 언어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사투리는 진정 교정의 대상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준어를 배워야 하냐는 물음에 조정현 씨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물론 사투리를 쓰는 게 유대감을 느낄 수 있고 친근해서 좋긴 하죠. 그런데 우리 세대는 태어난 지역에서만 생활권이 주어지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다들 서울로 취직하려하고 그러면 표준어는 필수죠. 그리고 표준어가 더 듣기 좋고 부드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니까요.”

▲ 사투리 때문에 왕따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힌 탤런트 문채원 씨

남태경 씨도 여기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고 했다. “제가 면접 스터디를 대구와 서울 두 군데서 하는데 확실히 차이가 있어요. 피드백 시간에 같은 지적을 해도 서울 사람들보다 대구 사람들이 더 직설적으로 말해요. 그러니까 듣는 입장에서는 서울말이 더 좋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이런데) 면접관은 당연히 표준어에 점수를 주겠죠. 취업을 위해선 표준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문가들은 취업이 어려운 현실이 사투리를 교정의 대상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언어학과 김주원 교수는 “교정(矯正)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인데, 고유한 체계나 독자성을 가지는 사투리는 교정의 대상은 아니다"라면서도 "사투리 교정 학원이 뜨는 것은 취업난 등과 맞물린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봐야 한다."고 전했다.

또한 사투리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이상규 경북대 교수는 “표준어 공교육체제가 확립되면서 사투리는 둥지 밖에 있는 알 신세가 됐다.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사투리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점차 사라지고 있다. 사투리는 언어의 변이종이기 때문에 다양할수록 언어생활이 풍부해진다. 사투리와 표준어를 대립관계로 보고 (사투리가) 표준어에 비해 촌스럽고 부끄럽다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방언은 단순한 지역 언어가 아니라 지역의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체계다. 방언이 사라지면 지역 문화도 사라진다. 사투리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지역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반도 이 좁은 땅 덩어리에 전국 8도 사투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다시 말해 8개의 지역문화가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서울인구집중이 가속화되면서 전국 8도가 서울 1도로 획일화되고 있다. 각 도시의 젊은이들이 고향을 놔두고 서울로 떠나고, 친숙했던 사투리를 버리고 낯선 표준어를 택한다. 지방에서 태어난 죄로 교통비와 학원비를 들여가며 표준어를 배워야 하는 이들은 서럽다. “더 서러운 건, 이렇게 노력해봤자 우리는 이방인이라는 거죠.” 조정현 씨는 씁쓸하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