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20의 새로운 연재, 독립기념일!

성인이 된 20대가 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독립기념일'은 가상의 화자 '나'가 부모님의 품을 떠나 독립하면서 겪는 일들을 다루는 연재 소설입니다. '나'의 독립 스토리를 통해 20대의 독립에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하고, 20대의 독립에 대한 고민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4화

어제는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독립을 하고 피자 가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로, 부모님은 매번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씀하시곤 한다.


“돈 벌어보니까 힘들지? 언제든 좋으니 집에 와서 따뜻한 밥이나 먹고 가라. 용돈도 좀 줄 테니.”

그럴 때마다 나는 집에는 가도 용돈은 됐다고, 별로 힘들지 않고 즐겁다고 목소리를 한 톤 올리며 말했다. 독립 3주째, 슬슬 독립의 환상이 다 깨지고 현실만 남아서 고통이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겨우 시급 5천 원짜리 알바를 뛰면서 생활비에 방세도 해결하고, 틈틈이 다음 학기 등록금까지 모아놓으려고 하니 삶이 이만저만 후달리는 게 아니다.

밥값을 아끼겠다며 고시원에 기본으로 비치된 쌀, 김치, 계란, 라면으로만 끼니를 때우고, 친구들이 부를 때는 아르바이트 중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돈 아낄 생각으로 할 일이 있다고 둘러대기 바쁘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알바까지 한 후에 녹초가 된 몸으로 과제를 하다 새벽에 잠들 때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려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사나 싶기도 했다. 멀쩡한 집 놔두고 독립이 뭐라고. 하지만 독립선언문까지 쓰고 결심한 게 민망해지기 싫어서라도, 이 생활을 끝까지 잘 해내고 싶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아무튼 오늘도 피자 가게로 향한다. 아직 어설프기만 한 초짜 아르바이트생이지만, 점점 피자 가게 나가는 일이 즐거워지고 있다. 아르바이트 자체가 재밌어서라기보다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는 게 좋아서랄까. 일을 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긴 시간을 같은 장소에서 일하고 또 피자 가게에서 일을 하는 처지가 비슷하다보니 공감할 거리가 많아서 오래 알아온 사람들처럼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 미스터피자 블로그※ 위 사진은 본 글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가장 친해진 사람은 같이 주방 안에서 일하는 스물여덟 먹은 정우 형이다. 무뚝뚝해 보이다 못해 ‘나 시크해’라고 써 놓은 듯한 생김새 때문에 사실 처음엔 좀 거리감이 느껴졌는데, 알고 보니 되레 수더분한 스타일이었다.

“어이, 신삥님. 너는 알바 뭐하려고 시작했냐?”

이런 식으로 말을 튼 이후로 정우 형은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걸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수도권 한 대학의 불문과를 나왔다는 정우 형은 프랑스어를 해 달라고 조르면 봉쥬르, 쥬뗌므, 마드무아젤 같은 조각 단어들을 내뱉고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그는 애초에 전공을 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군대를 전역한 후엔 노량진에 터를 잡고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세 번째마저 낙방하자 더 이상 안 될 시험에만 매달릴 수가 없어 여기에 들어왔다고 했다. 열심히 일해서 매니저 자리에 올라 직업으로 삼으려고 말이다. 정우 형은 하루에 한 번 정도는 군대 가기 전부터 목표를 생각해야 된다느니, 군대나 빨리 가라느니 하는 꼰대 같은 소리를 내게 건넨다. 하지만 꼰대스러운 말이라고 해도 어쩐지 불편하지가 않다.

그리고 저기, 매장 안을 나름대로 카리스마 있게 휘젓고 돌아다니는 미진 누나. 스물다섯인 미진 누나는 우리 지점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정우 형은 나이도 자기보다 어린 애가 매니저랍시고 잔소리를 하고 시키는 게 많다며 투덜거리곤 하지만, 사실 경력으로 보면 미진 누나는 우리 가게의 역사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수능을 본 후 그러니까 열아홉 겨울부터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햇수로는 벌써 7년째, 매니저까지 못 올랐으면 그게 더 억울할 세월이다. 지난 번 손님이 한 번 뜸했을 때, 미진 누나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서 왜 이렇게 오래 한 곳에서 일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뭐, 그냥. 어릴 때 용돈 벌려고 시작했지. 여기서 일해 번 돈으로 옷 사고, 화장품 사고. 처음엔 학교 졸업하면 아르바이트도 때려치울 줄 알았어. 근데 전문대 졸업하고 나니까 딱히 전공 살려서 가고 싶은 일자리가 없더라. 그래서 여기서 몇 년 일한 거 아깝기도 하고, 여기 눌러 앉아버린 거지.”

‘매니저님’이기 때문인지 아님 똑부러지는 성격 때문인지 지켜보고 있으면 왠지 멋있다는 생각이 드는 미진 누나. 영업 마감 시간이 되면 꼭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친구와 함께 거리 속으로 사라진다.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정우 형한테 전해들은 바로는, 남자친구 분은 이 근처 대학 경영학과 졸업반이라고 한다. 아, 그리고 정우 형이 덧붙이는 한 마디.

“아, 그런데. 세 달 전에는 매니저님 기다리는 남자친구 말이야. 다른 사람이었어. 그 때는 정치학도라고 했었나.”

뭐라는 건지, 원.

ⓒ http://garden.egloos.com/10002868/post/55010



아, 그리고 알바 면접을 보러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계산대에 서 있던 예쁜 그 직원과도 안면을 트게 됐다. 직원은 아니고 알바생이었는데, 이름은 채영이. 나보다 한 살 어린 대학 2학년생이었다. 알고 보니 나랑 같은 대학에 다녀서 좀 친해질 기회가 있었는데,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 아이는 언제나 혼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언젠가 지나가다 인사를 했는데 모른 체 지나가기에 쫓아가서 오지랖을 좀 떤 적이 있는데 그러니까 다가가서 이렇게 헛소리를 지껄인거다.

“야, 채영아. 넌 뭐가 그렇게 맨날 바쁘게 보이냐? 나도 학교도 다니면서 생활비 벌려고 아르바이트 하고 해도 삶에 여유는 좀 있잖냐. 너무 빡빡하게 살아도 남는 것 없어. 주변도 좀 둘러보고, 응?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거 아니겠냐. 그러니까 오빠 보면 좀 인사도 하고, 놀아도 주고. 어때!”

평소엔 잘 하지도 않는 잔소리를 어찌나 어설프게 늘어놨는지. 안 그래도 민망했는데 더욱 민망한 상황이 된 건,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채영이의 낯빛이 어둡게 바뀌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티 없이 예쁘기만 한 줄 알았던 그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그 순간, 난 뭔가 내가 큰 잘못을 저질러 버린 것 같아 가슴이 쿵쾅거렸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어떤 말이라도 한 마디라도 더 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직원용 물품보관실에서 채영이를 마주쳤다. 어쩐지 뭔가 어색한 분위기. 채영이가 아무 말없이 먼저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나는 정우 형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정우 형은 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임마 대체 너 왜 그랬냐. 채영이 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셔서. 자기 생활비에 등록금까지 벌고, 아르바이트 끝나면 병원에 간호하러 가고 그런다더라. 아르바이트 힘든 거 잘 알면서 버티는 애들, 그냥 용돈벌이 하려는 애들도 많지만 생각보다 사연 있는 애들도 많아. 다른 친구들한테도 이런 말 쉽게 내뱉고 그러면 안 된다, 너.”

아차, 엄청난 실수를 했구나. 어쩐지 채영이에게만은 난 사실 집에서 살 수도 있는데 독립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서 집을 나와서 내가 쓸 돈은 내가 다 벌려고 하고 있다고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기서 일하는 아직 친해지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이 뭔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피자 가게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마흔 세 명. 그 마흔 세 명이라는 숫자만큼 마흔 세 개의 청춘의 찌릿한 이야기들이 있을 거다. 그들이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 시급 오 천 원에 매달려야만 하는 이유 같은 것들. 어쩐지 오늘만은 고시원에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잔의 사치를 부려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