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20의 새로운 연재, 독립기념일!

성인이 된 20대가 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독립기념일'은 가상의 화자 '나'가 부모님의 품을 떠나 독립하면서 겪는 일들을 다루는 연재 소설입니다. '나'의 독립 스토리를 통해 20대의 독립에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하고, 20대의 독립에 대한 고민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7화

서울은 밤이 없는 도시다. 11시 무렵에 퇴근을 하면 길거리는 오히려 환하게 달아올라있다. 고시원에 가까워질수록 길은 어둡고 조용해졌다. 가로등이 지키고 있는 이곳은 소란을 용납하지 않는 듯 보였다. 집은 기분 나쁘게 더웠다. 불을 키니, 책상위에는 아직 몇 번 펼쳐보지도 못한 책들이 펼쳐져 있었고 가방 안을 굴러다니며 찢어진 종이들이 쌓여있었다. 한심한 기분이 들어서 불을 꺼버렸다. 우두커니, 이 방을 얻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망가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의 모습은 패배자에 가까웠다. 시간을 쪼개서 일해도, 돈이 없다. 추억이 없다. 낭만이 없다.



무엇보다 이 공간은 나의 집이 아니었다. 꼭 집과 땅을 사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무리 멀리 떠나도 언젠가 돌아올 수 있는 곳이란 확신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내게 있어 집이란 그런 곳이다. 베이스 캠프가 단단하지 않으면 결코 먼 길을 떠날 수 없다. 아직도 독립은 한참 멀었다. 고시원은 내가 안착할 공간이 아니다.

배를 보이며 아등바등하는 벌레 같은 이 노력이 과연 쓸모있는걸까, 부모님 옆에서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취업준비를 하고 가끔 연애도 하는, 그런 생활이 옳았던 것 아닐까.

민준이는 들어오지 않았는지 옆방도 조용했다. 더 이상 혼자 있으면 안될 거 같았다. 하지만 부모님께는 전화할 수 없었다.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울 것 같았다. 동기들을 하나, 둘 떠올려보았다. 독립한다며 한동안 못봤던 친구들이다. 평소에 술 마시자고 할까봐 돈 한푼 아끼려 이리피하고 저리 피했던 친구들을 이럴때 만나려니 입맛이 쓰다. 최근 발신목록을 살펴보니 모르는 번호가 찍혀있었다. 아, 채영이 번호구나. 전에 한 말이 걸려 사과라도 해볼까 해서 알아온 번호였다. 한참 고민하다 통화버튼을 눌러버렸다. 누르고나서 아차 했지만 다시 끊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과하려고 했으니 전화나 한 통 하지 뭐. 그래도 좀 떨렸다. 채영이가 받을까? 혹시 꼰대 같은 오빠라고 안받는 거 아냐? 아, 채영이는 내 번호가 없겠구나.


“...세요.”

내가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전화를 받아버렸다.

“여보세요?”

뭐라고 얘기해야하지? 이승원이 일생일대 위기다.

“아, 저, 그게, 그러니까, 채영이니?”

“잘못 거셨습니다.”

“뚝.”


뭐야 이건. 뭐지. 심지어 내 목소리도 듣기 싫은 건가? 그런 거야? 정우형, 전 미움받아버린건가요. 이런 빠른 거절을 받은 건 23년 인생에 처음이다. 그래도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좀 다른거 같기도 하다. 그래, 채영이 목소리는 저렇게 성깔 나쁜 목소리가 아니었어. 일단 정우 형한테 확인을 해보자. 그 다음에 좌절해도 늦지 않아.

‘ㅋㅋㅋㅋ 승원아 미안 번호 잘못줬음 010-XXXX-8617임’

답장 빠르네. 망할 정우 형.

이번에는 똑바로 채영이 번호를 저장했다. 이제 또 잘못걸 일은 없겠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제대로 받기를…….


“여보세요.”


채영이 목소리다. 약간 건조하고 시무룩한, 조용히 내 잔소리를 듣던 모습이 떠오르는 목소리다. 그 조용한 채영이를 생각하면 항상 씁쓸하다. 내가 전에 미안한 말을 했던 것도 있지만 그 나이에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못 누리는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대학의 진정한 주인은 2학년인데. 신입생 앞에서 조금쯤 우쭐해보고 신입생 때는 어설펐던 화장이 성숙하게 바뀌고 거침없는 연애담을 만드는 게 2학년이다.

하지만 채영이는 한 번도 꾸민 적이 없었고 언제나 옅은 화장만을 했다. 꾸민다면 분명 예뻐질 그 얼굴을 보면 나는 안타까웠다. 향수 냄새 대신에 샴푸 냄새가 나고 그마저도 퇴근 때면 피자 기름의 느끼한 냄새를 잔뜩 풍기며 집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연애는 사치리라.


“어, 저기 채영이니? 나 승원이 오빤데.”

“아……. 네,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막상 전화하니까 별로 할 말이 없다.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지?

“내가 전에 한 말 있잖아, 좀 미안해서. 꼰대 같은 소리해서 미안해. 다 나름 사정이 있는 건데 내가 너무 함부로 말했다. 저, 혹시 괜찮으면 다음주 화요일에 밥이나 같이 먹을래? 내가 살게.”

화요일은 나와 채영이 모두 알바 쉬는 날이다. 채영이는 다른 알바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네, 그러면 그 때 뵐게요.”

“어? 그래. 그러면 내가 나중에 다시 장소를 알려줄게. 그럼 화요일에 보자.”


헉, 채영이가 그렇게 선뜻 대답할 줄은 몰랐다. 채영이 엄청 바쁜데 내가 시간을 뺏은 거 아냐? 어디서 먹을지도 안정했는데 여자랑 저녁을 먹을 때는 어디로 가야 되지? 그동안 연애세포가 썩어 문들어졌는지 갈만한데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우 형한테 물어볼까? 에이, 그 아저씨는 나보다 심할 거다. 민준이가 들어오면 어디가 괜찮은지 물어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돈도 없다. 가끔 남은 돈으로 민준이와 맥주를 마시다 보니 그나마 용돈으로 남은 6만원은 1만원 밖에 남지 않았다. 저녁으로 기사식당에서 순대국을 사줄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봐야겠다. 음, 알바를 더 찾아볼까? 꺼림칙해서 피했던 생동성 알바가 갑자기 떠오른다. 마루타 3일하면 40만원이라는 데……. 밥 대신에 고시원 라면으로 때우면 좀 아낄 수 있을 거다. 그건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니까.

채영이만 그런 게 아니라 내게도 연애는 사치였다(엄밀히 말해 연애는 아니지만). 가난한 대학생에게는 낭만적인 대학 생활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는 우리의 낭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