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를 시청하다 보면 만능 엔터테이너들의 전성시대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가수들은 음악 프로그램과 드라마를 넘나들며 노래와 연기를 하며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입담을 과시한다. 개그맨들은 음반을 내 가수의 영역에 도전하며 MC를 맡아 프로그램 진행한다. 하지만 아직 쉽게 다른 이들이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바로 아나운서! 정확한 표준어 사용을 바탕으로 뉴스의 진행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그들은 방송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요즘 전문직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 아나운서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오늘은 아나운서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내딛고 있는 대학생 이승종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현재 이승종씨는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과를 전공, 신문방송학과를 부전공하고 있다. 한 때 연세대학교 교육 방송국(YBS)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한 바 있는 그는 지금은 몇몇 라디오방송국과 인터넷 방송국, 케이블TV에서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분! 중학교시절 유망한 야구선수였던 데다가 한 때 가수도 준비도 했다는데?! 독특한 이력을 가진 그의 뒷이야기와 함께 꿈에 대해 이야기 해보았다. 마침 녹음을 마치고 왔다는 그는 정장차림의 깔끔한 모습이었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을 얼핏 엿볼 수 있었다.



  Q. 야구선수 활동경력이 독득하신데, 얼마나 활동하셨었고 왜 그만두게 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초등학교 5학년 때 리틀 야구단에서 활동을 하게 된 것이 계기였어요. 야구만 5년을 했고, 꽤 잘해서 인정받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부상을 당했어요. 원래는 타격 연습 중 왼팔에 공을 맞아 다쳐서 병원에 갔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평소 시큰 거렸던 오른쪽 팔꿈치 인대가 손상돼서 재활훈련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야구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뜻이었죠. 재활을 하려면 보통 2년 정도가 걸리는데 특기생으로 뽑아놓고 2년 재활을 해주고 1년만 쓰려는 고등학교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그만두게 되었죠.

  Q. ‘야구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메이저’라는 만화가 있어요. 그 만화 주인공 이름이 ‘고로’인데, 야구를 하다가 오른팔을 다치지만 왼손 투수로 전향에서 결국엔 메이저리그까지 가요. 저는 모든 온라인상 아이디를 ‘고로’라고 짓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그냥 중간에서 끝난 거지만 그 주인공은 다시 도전해서 이루어 낸 거죠. 돌아보면 인생의 지나는 과정 중 하나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말 그대로 미쳐버리는 줄 알았죠. 그 때 까지 해온 게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거였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꿈이 야구선수였으니까. 

Q. 쉽게 인정하실 수 없었겠어요?

  사실 인정 할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봐도 당시에 내 팔이 이상했으니까. 공도 점점 느려지고, 변화구도 제대로 던질 수 없었고.  

Q. 그럼 야구 선수가 되기를 포기하고 바로 아나운서라는 꿈을 가지게 된 건가요?

  아니요, 원래는 PD를 하고 싶었죠. 저는 대학 처음 갈 때까지만 해도 드라마PD가 꿈이었어요. 외모와는 달리 ‘가을동화’, ‘겨울연가’ 같은 멜로드라마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옛날에 어떤 캠프를 간적이 있는데. 제가 속한 조가 굉장히 말썽꾸러기 조였어요. 마지막 날 밤 조별 장기자랑같은 거 꼭 하잖아요? 그 때 뭘 할까 하다가 뭐 다들 하는 노래나 춤 대신에 연극을 하기로 했어요. 캠프에서 있었던 일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일종의 반성연극을 하기로 한 거예요. 제가 대본과 무대를 연출했었죠. 그 날 무대에서 연극을 끝난 순간, 선생님들이 우시기 시작했어요. 저도 마지막 인사할 때 울먹였고요.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인다는 게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그래서 처음에는 사회학과에 지원했던 거예요. PD중에 사회학과 출신이 많거든요.

Q. 그렇다면 PD에서 아나운서로 또 다른 전환을 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참 그거야말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우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2003년 초반 여자 친구가 있었거든요? 그 친구가 연세대학교 교육 방송국(YBS)에 원서를 쓴다고 하는 거예요. 저는 YBS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알아보니 거기 들어가면 서로 얼굴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 나도 YBS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 원서를 넣었던 거죠. 뭐 원래 제 꿈이 PD이었던지라 처음에 1지망에 PD, 2지망에 아나운서를 썼는데 PD시험은 노래를 듣고 누구의 무슨 노랜지를 맞춰야 한다는거에요. 음악방송을 자주 하니까요. 근데 저는 제가 자주 부르는 노래 가수 이름도 잘 몰랐거든요. 그 순간, 아 이거 안 되겠다. 일단 들어가는 게 목적이니까 그럼 1,2지망을 바꿔보자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1지망에 아나운서를 적게 되었어요. 그렇게 시작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운명이라 여기는 일의 시작이 너무 사소했던 작은 우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죠. 솔직히 말하면 가장 하고 싶은 건 연출이지만 경제적 측면이나 사회적 인지도를 고려하다보니 어떻게 보면 타협하게 된 면도 있죠. 저는 좋은 아빠, 존경하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알면 알수록 PD는 가정적이기에는 힘든 직업적 요소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살면서 더 천직이라 생각하고 미련 없이 덤비게 된 것 같습니다.

  Q. 그러면 지금 현재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몇몇 인터뷰 방송국과, 지역 라디오와 방송국, 케이블 방송국에서 간간히 아나운서 일을 하고 있어요. 주로 맡는 프로그램은 짧은 뉴스나 아니면 아예 음악방송 DJ를 하고 있지요.




  Q. 방송을 하시다보면 어느 때 보람을 느끼세요? 

 시청자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느껴질 때가 가장 보람 있어요. 한번은 제가 방송에서 실시간 댓글이 몇 개 이상 달리면 노래를 하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몇 십 개가 달리는거에요. 그때 알았죠. 누군가 듣고 있다는 것을, 참 신기하면서도 즐겁더라고요. 반대로 방송할 때 반응이 없어서 “누가 듣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많이 허무함을 느껴요. 그래서 방송의 생명은 리액션이라고 하나봅니다^^

  Q. 앞으로의 목표는요? 

 단기적 목표를 2014년 월드컵 중계라고 정하고 있어요. 물론 그 전에 바늘구멍이라는 공채시험에 합격을 해야겠지만^^ 전에 운동을 했었고 지금도 워낙 좋아해서, 스포츠랑 예능을 같이 하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네요. 롤 모델이 김성주 아나운서인데요. 물론 프리선언 전까지^^; 남 앞에서 잘났다고 떠들고 가르치는 방송인이 아니라 같이 슬플 때 눈물을 흘리고 같이 웃을 때 나도 크게 웃을 수 있는, 그렇게 욕을 먹지 않고 함께 공감해가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요. 남 앞에서 이렇다 저렇다 떠드는 잘난 방송인보다는 남과 함께 같이 울 수 있는 그런 바보 방송인.

  Q. 자신의 꿈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대학을 처음 들어오는 후배들이 물어보면 많이 해주는 얘기인데, ‘무한도전’의 ‘유재석’이 대타가 가능할까요? 그런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 되라. 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어디서든 나면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아직 저도 이런 확고한 캐릭터의 성립은 노력중이지만, 자신의 ‘이름’에 대한 임팩트를 심는 것. 아 그 사람이면 잘할 걸? 이 아니고 그 사람 아니면 안 돼! 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죠, 말 그대로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Q. 끝으로 20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는 1주일에 하루라도 집에 있는 것이 불안했어요. 그런 날은 꼭 내가 친구가 없는 것 같고, 할 일도 없는 것 같고. 왕따 강박관념이라고 해야 될까요.(웃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일종의 조바심이었나봐요. 사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일주일 중 하루, 이틀은 쉬어야 나머지 5일을 알차게 보낼 수 있잖아요. 쉬어야 할 때, 일해야 할 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한국사회에서 20살이란 다른 나라의 그 것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고 생각해요. 그간은 교육제도와 집에서의 지도대로 살아오다가 20대가 되면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가 설계할 권리와 자유가 생기게 되는 거죠. 그런데 말 그대로 그 전에는 시키는 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너무 혼란이 올 수 있어요. 이제 더 이상 누가 시켜주기를 바라는 자세 대신에 스스로가 목표를 정하고 어떠한 원칙과 소신에 따라서 움직이는 거죠. 대신 처음부터 너무 크고 거창한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작은 목표를 세웠는데 실패한다면 조금 그 목표를 줄여서 다시 도전하고, 이번 목표를 이룬다면 다음 목표는 좀 더 크게 도전하고. 실패와 도전이란 20대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패 없는 성공을 거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 성공이라는 것도 객관적인 성공보다는 주관적으로 만족도를 얻어가는 목표였으면 합니다. 뭐 사실 말은 그럴 듯 하지만 또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서는 그냥 편하게 생각나는 대로 결정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왜 꼭 그렇잖아요, 고민하던 언어영역 문제의 답은 처음 떠올랐던 그 것이다! ^^

  이렇게 이승종씨와의 인터뷰를 마쳤다. 꿈을 향해 지금도 하루, 한 주, 한 달, 그렇게 일 년을 앞으로 나아가는 20대 청년. 초등학생이었던 예전의 그가 야구방망이와 공을 잡았을 때 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노래를 부르던 그가 지금의 그를 상상해 본적이나 있었을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존재감 있는 사람이 되라‘는 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리고 그 말에 책임지고자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