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20대는 특별하다. 20대가 주는 직관적 느낌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의 사회구조적 환경 하에서 20대는 분명, 어느 세대보다 자유를 품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을 자신이 정하고, 자신이 밀고 나갈 수 있다. 설사 그 꿈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향후 인생의 토대가 된다. 20대를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준비했다.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대선 주자도 '누구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들에게도 20대는 특별하고 각별하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치장된 현재의 모습은 잠시 접어두자.  온 몸으로 삶을 살아가던 20대 시절의 그들을 되짚어보았다. 대선주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그들을 느껴보고자 했다. 고함 20이 준비한 '대선후보의 20대 기획'이다.



입시, 연애, 대학생활, 취업. 20대의 전부는 아니지만 20대라면 누구나 추상적으로 상상해보고 구체적으로 겪어봤을 법한 얘깃거리들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딸에겐 녹록치 않았던 것들이다. 1952년 생 박근혜 후보는 1970년 성심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며 20대를 맞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언한 건 이로부터 3년이 좀 못돼서의 일이다. 대통령, 특히 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의 딸이란 굴레는 그에게 평범하지 않은 20대의 모습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됐다. 박근혜 후보의 20대는 ‘그를 단련시킨 절망’과 ‘그를 움직인 희망’이 공존하던 때였다.


입시, 전자공학도를 꿈꾼 우등생

고등학생 박근혜는 공부를 잘하냐는 질문에 “잘하나 봐요”라고 스스로 대답할 정도로 공부를 곧잘 했던 것 같다. 그의 우수한 성적은 박정희·육영수 부부가 여러 갈래의 장래를 희망할 수 있게 하는 요건이었다. 박근혜 후보는 역사학과에 가기를 바랐던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조그만 트랜지스터 하나가 20~30달러나 하고, 007가방 하나 분량이면 몇 만 달러나 한다. 대한민국은 전자산업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말에 깨달음을 얻어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여기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다.

입시생 박근혜가 대통령의 딸이라 해서 시험에서 가산점을 얻었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특별대우를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교비평준화로 각 학교의 차이가 컸던 당시 정황을 고려해볼 때 박근혜가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지금처럼 일제고사를 치르는 게 아닌 대학마다 본고사가 따로 있어 입시성적으로도 평가가 힘들다. 그때도 대학서열은 있었지만 서울대에 가지 못한다 해서 꼭 연세대·고려대를 지원했던 것은 아니라는 증언도 있다.




미팅 한번 못해봤던 대학생활

고등학교 때와 비교해 비범했던 대학생활이었다. 당시 또래 여대생들은 강의가 끝나면 음악감상실이나 영화관을 찾아 관심사를 공유하고 대화를 나누는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외교사절로 나서는 일이 부쩍 많아졌고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그럴 수가 없었다. 스페인과 하와이를 방문하며 외국어 능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저서에서 자신을 다른 것보다 수업시간에 가장 몰두했던 ‘공부벌레’라고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이 그를 자기규제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박근혜 자신이 실수를 해 부모에게 누가 되는 일이 없게 항상 긴장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청와대 경비팀의 감시도 자유로운 생활을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학기 중 ‘일탈’이라고 표현한 단 하루를 제외하고 학교와 그 근처를 벗어났다는 기록은 없다. 빵집에서 미팅을 하는 것도, 남학생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도, 밤늦게 다니는 것도 피했다. CC(캠퍼스커플)는 꿈도 꾸지 못했다. 74년 수석졸업은 철저한 자기관리가 낳은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가장 자유로웠던 유학생활, 그리고 날아든 비보(悲報)

박근혜 후보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 그르노블대로 진학해 본격적으로 프랑스어를 공부한다. 전자공학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이었다. 빡빡한 커리큘럼의 고등학교와 자기규제가 강했던 대학교 생활과 달리 유학생활은 대체로 자유로웠다. 한국과 먼 타지,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며 개인적인 공간을 얻었던 게 큰 도움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한 프랑스 가족의 부활절파티에서 감명을 받아 좋은 남편을 만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삶을 꿈꾸던 때였다. 

유학생활 중에도 일주일에 한번만 친구들과 모임을 갖자는 규칙을 정하는 등 자기관리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수업을 마친 후엔 되도록 일찍 하숙집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유학생 박근혜가 정한 규칙 중 하나였다. 다양한 국적의 대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며 교류하고 교감을 나눴지만 이를 지속시키려 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기엔 유학 생활도 너무 짧았다. 프랑스에 건너온지 6개월만인 74년 8월 15일 박 후보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피격됐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의 퍼스트레이디’

행동만큼이나 감정을 절제해왔던 박근혜 후보가 정신적 고뇌를 드러내는 건 이때부터다. 책으로 엮어낸 자신의 일기도 어머니가 죽은 지 얼마 후인 74년 9월 14일로부터 시작한다. 청와대를 떠나기 전까지 박 후보가 쓴 일기 대부분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주제다. 당시의 박 후보는 육영수 여사를 높이 평가하며 우상화하고 있다. 일상에서나 퍼스트레이디로서나 그가 떠올리고 그리는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 한결같이 올곧다는 면에서 나오는 평가다. 그는 “어머니의 행적은 나에게 훌륭한 교과서가 되었다”고 얘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박 후보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에 더욱 책임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만 22살의 나이에 프랑스 유학 후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그리고 장례식을 치른 지 불과 엿새 후 퍼스트레이디의 징표를 달고 공식 석상에 나섰다. 청와대에 들어온 수백건의 민원을 점검하고 담상 부서에서 잘 처리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그가 하는 일이었다. 또한 낙후된 환경에 처해있는 영세기업과 소외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 귀빈을 접대하는 일도 그가 퍼스트레이디로서 맡은 임무였다. 박 후보는 1979년 방한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내외 외에도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수많은 나라의 정상 혹은 대사들과 외교를 목적으로 만났다. 그가 외교력을 “오랜 시간 숙성되어야 깊은 맛이 나는 와인”(자서전)에 비유한 이유다.


사라진 18년의 시작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피살당하고 박근혜 후보는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의 나이 만 27세, 박근혜 인생에서 사라졌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18년’의 시작이었다. 박 후보에 따르면, ‘사라진 18년’은 4공화국 이후의 정권이 박 전 대통령을 매도했기 때문에 집에서 나올 수 없었던 비자발적 칩거 기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구체적인 행적은 문서로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는 아버지를 비난하는 데 동참했던 박 전 대통령 측근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자신과 바깥 세상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심경은 일기모음집을 비롯한 이후 출간된 책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너무 닮은 두 명의 박근혜

박근혜 후보는 얼마 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며 5.16쿠데타와 유신에 대해 전향적 자세를 내보였다. 그러면서도 최근에는 “정수장학회는 강탈한 게 아닌 헌납 받은 것”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어느 쪽이 우리가 아는 박근혜일까?

알다시피 박근혜 후보의 20대엔 연애와 취업의 흔적이 없다. 입시와 대학생활도 여느 사람과 같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퍼스트레이디로 국정운영에 참여한 경험이 그렇다. 부모 모두 저격을 당해 죽은 기억은 인식체계 깊이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2007년의 정치인 박근혜가 바라본 20대 박근혜가 서로 닮은 이유가 아닐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27세 박근혜는 “전방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54세 박근혜는 2006년 선거운동 중 피습을 당해 잃은 의식을 되찾은 후에는 “대전은요?”라고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