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20대는 특별하다. 20대가 주는 직관적 느낌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의 사회구조적 환경 하에서 20대는 분명, 어느 세대보다 자유를 품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을 자신이 정하고, 자신이 밀고 나갈 수 있다. 설사 그 꿈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향후 인생의 토대가 된다. 20대를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준비했다.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대선 주자도 '누구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들에게도 20대는 특별하고 각별하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치장된 현재의 모습은 잠시 접어두자. 온 몸으로 삶을 살아가던 20대 시절의 그들을 되짚어보았다. 대선주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그들을 느껴보고자 했다. 고함 20이 준비한 '대선후보의 20대 기획'이다.


20대의 멘토로 불렸던 안철수 후보. 그의 20대는 어땠을까? 안 후보 역시 입시, 연애, 대학생활, 군대, 취업 이 다섯 가지 관문을 모두 겪은 평범한 20대를 보냈다. 하지만 그 면면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의사인 아버지를 보며 서울대 의대를 진학했던 스무 살부터 가슴이 뛰는 일을 하기 위해 백신 개발에 뛰어들기 까지. 안 후보의 20대는 ‘성공한 CEO 안철수’가 되기 위한 전주곡이었다.  

아버지 바람에 따라 의사의 길 택해

안 후보가 의대에 진학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안 후보의 아버지는 장남인 안 후보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의사가 될 적성은 아니었다. 전자공학과나 수학과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희망은 안 후보에게 큰 짐이었다.

결국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갈 때 의과대학에 가기로 결심한다. 의사인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자신도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될 것이라 자연스럽게 생각해온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장남으로서 가업을 잇는다면 부모님이 기뻐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고,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안 후보는 1980년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기초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환자 진료보다 실험을 통해 병의 원인을 밝히는 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의대생 안철수의 시작이었다.



의과 대학 생활, 공부 중압감 때문에 방황하기도

의과대학은 공부의 양이 많고 그 난이도 또한 매우 어려웠다. 안 후보는 대학 입학성적이 높은 편은 아니었어도, 점차 학과 성적이 올랐다고 회고한다. 성실성과 집중력 덕분이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엄청난 양을 암기해야 했기 때문에 벼락공부가 통하지 않았다. 얼마나 성실한가에 의해 성적이 좌우되었다. 또한 안 후보는 어떤 일에 한번 몰입하면 다른 것을 다 잊어버릴 정도로 집중력이 뛰어났다. 집중력은 공부하는 데 효율성을 높여주었다. 그 결과 졸업할 때 즈음엔 성적이 좋아 원하는 과를 골라갈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 안 후보에게도 방황의 시기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2009년에 출판된 안 후보의 책 ‘행복 바이러스 안철수’에 따르면, 본과 1학년을 마친 후는 안 후보 평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본과 1학년 땐 오로지 공부만 해야 했다. 원하는 과를 가기 위해선 성적을 잘 받아야 했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중압감이 심했다.

1학년 겨울 방학, 부산에 갔다가 서울에 다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공부만 해야 하는 비인간적 생활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지겹게 느껴졌다. 안 후보는 “방황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는데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느낌이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난감했다”고 회고한다. 안 후보는 “의과대학 생활을 견디기 위해선 스스로에 대한 구속과 기대를 어느 정도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2학년 때부터는 동아리 활동을 하고 친구들과 술도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무의촌 의료봉사하면서 사회 현실에 눈 떠

의대 본과 2학년 때부터 3년 동안 서울 구로동 무의촌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했다. 신자는 아니었지만 의과대학 내 카톨릭 학생회에 들어갔다. 카톨릭 학생회는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이 연합하여 조직한 진료 동아리였다.

의료봉사 활동은 안 후보가 사회 현실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안 후보는 빈민촌 사람들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돈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사람이 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가족관계도 최저 수준 이상의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책으로만 보아오던 광경을 직접 목격하며 안 후보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봉사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각자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시점이다.




“아내는 나, 우리 두 사람은 척 보기에도 무척 닮은꼴”

동아리에서 안 후보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생긴다. 바로 안 후보의 아내, 김미경 교수를 만난 것이다. 김 교수를 만난 것은 안후보가 3학년이었을 때다. 김 교수는 본과 2학년에 올라갈 때 동아리에 들어왔다. 안 후보는 처음부터 김 교수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고백한다. 김 교수에 대한 첫인상은 ‘늘 혼자인 학생’이었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려 많이 노력했지만, 그래도 본래 혼자 있기 좋아했던 안 후보는 그런 아내를 보며 ”우리 두 사람은 척 보기에도 무척 닮은꼴이었다“고 회고한다.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살아온 과정, 가치관,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도 비슷함을 느꼈고 이에 호감이 더해갔다. 다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점차 가까워졌다. 어느새 그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울대 의과대학 안에서 꽤 유명한 CC캠퍼스 커플이 되어 있었다. 이들 커플은 안후보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결혼한다. 결혼 생활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했다. 다툴 때에도 끝까지 존대말을 썼다.  




백신 개발,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다

결혼 후 1989년 단국대 의대교수로 채용된다. 26살의 나이였다. 의예과 학과장 또한 맡게 된다.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교수가 네 명밖에 없었고, 의과대학 학장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 중 두 명이 의학과장과 의예과장을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안 후보는 그 후 1년 반 동안 단국대 의대 교수를 지낸다.
 
1982년 가을, 같이 살게 된 친구의 집에서 그 당시 처음 나왔던 애플 컴퓨터를 만나게 된다. 컴퓨터와의 첫 만남이다. 1983년 겨울, 컴퓨터를 직접 구입한다. 당시엔 컴퓨터에 대한 책이나 전문지가 거의 없어 독학해야만 했다. 당시 컴퓨터 공부는 의학 전공을 더 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다 1988년, 운명적 사건을 맞는다. 당시 브레인 바이러스가 한국에 유행하고 있었다. 안 후보의 컴퓨터도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안 후보는 바이러스를 분석하여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해낸다. 본업인 의학 실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신을 개발한 것은 ‘바이러스에 피해를 입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했던 일’이었을 뿐이다.

이후 바이러스 치료에 대한 문의가 늘어난다. 그렇게 안 후보의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7년 동안 낮에는 진료를 하고, 밤에는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백신 프로그램 개발할 시간이 부족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3시간 동안 백신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열중했다. 안 후보는 힐링캠프에서 ‘3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7년 동안 했는데, 7년 째 되는 날에도 일어나기가 힘들더라’라는 말을 하며 당시를 회고했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백신 프로그램 개발에 열중했다. 그렇게 개발된 백신은 무료로 배포됐다. 이에 안 후보는 “내가 받은 일부라도 사회에 돌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해군 군의관 복무, 군입대로 20대를 마무리하다



안 후보가 전하는 군입대 날은 마치 시트콤의 한 장면과 같다. 1991년 2월, 미켈란젤로 바이러스가 국내에 퍼졌다. 군입대 전에 백신을 만들어야 했다. 결국 새벽까지 백신을 만들다가 허겁지겁 입영 열차를 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온 것이 생각났다고.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해군 군의관 생활을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39개월의 군대생활. 안 후보가 배치된 곳은 의학연구나 컴퓨터 일을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저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안후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할 일이 없었다. 국민이 낸 세금을 월급을 받는 것도 민망할 정도였다. “어떤 조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군대에서도 컴퓨터 일을 계속해서 백신 개정작업을 했고, 책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군생활로 20대를 마무리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