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이 흐려지거나 목적을 상실하면 고전으로 돌아가라.’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 적용해도 이상할 것 없는 말이다. 중세 암흑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럽은 그리스를 찾았고, 유학의 본질은 잊고 당쟁에만 빠져있던 조선 후기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정조는 육경을 활용했다. 그 결과 유럽은 천 년간의 암흑을 일순간의 찬란한 광명으로 바꾼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었고, 민중의 현실은 외면하고 당쟁에 매몰되어 있기만 하던 조선은 중흥의 마지막 희망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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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대학가의 유행은 멘토링이라고 한다. 갈수록 경쟁만 심화되는 이 사회 속에서 사회 진출을 앞두고 있는 대학생들을 위해 학교 차원에서 선배라는 견인차를 붙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급하게 먹으면 체하기 마련이다. 후배들을 정말 아끼는 마음에 멘토 행사에 참석한 선배가 선배들에게 좋은 정보를 얻고 진심으로 따를 후배를 만나는 아름다운 일이 그렇게 많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단순히 지원금이나 한 끼 밥을 위해 참여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렇게 ‘참되면서도 효율적인 선후배 관계’라는 취지로 시작된 멘토링 시스템이 형식만 추구하게 된 이 안타까운 현상에 역사 속 멘토링 사례들은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을 주고 있다.

 우선 첫 번째로 볼 사례는 고려시대에 있었던 좌주와 문생의 관계이다. 좌주는 고려 당시 과거 시험을 주관하던 관리를 뜻하고 문생은 그 과거를 통해 급제한 관리를 말한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선후배 관계를 뛰어넘는다. 문생들과 자손들을 한 데 모아놓고 서로를 형제와 같다 말하기도 하고 자신의 문생이 문생을 받게 되면 마치 손자를 본 양 기뻐하였다. 문생에게 있어서 좌주의 위엄은 마치 어버이 같아 함부로 항례할 수 없었으며, 당연히 좌주에 대한 잘못은 부모에 대한 잘못처럼 뉘우칠 길이 없었다. 관직에 있어서는 선후배이고 학문에 있어서는 스승과 제자였으며, 정신적 교감으로는 부모자식관계 그 이상이었다. 지금의 멘토링 시스템은 감히 비교도 못할 만큼 끈끈하고 무거운 관계이다.

 두 번째 예는 성경에 나오는 바나바와 바울의 관계이다. 처음 만나고부터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날 때까지 바나바는 바울을 끊임없이 이끌어준다. 바울이 인간 관계상 문제가 생겼을 때는 직접 중재자로 나서 길을 터주기도 하고, 후배의 도약을 위해 자신의 일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사역에 있어서 바울의 비중이 높아지자 겸손한 자세로 후배의 성장을 흐뭇하게 지켜보기도 하였다. 바울의 성장에 바나바의 견인이 큰 역할을 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예가 있다. 당대의 고승이자 위기의 조국을 위해 힘 쓴 스승과 제자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관계나, 장애를 극복한 헬렌 켈러와 그 선생님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넓은 의미에서 보았을 때 강화도에서 양명학을 전수하며 조선 말기 진보 지식인을 양성했던 강화학파도 은둔적인 특성상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점에서 일종의 멘토링으로 볼 수 있다. 멘토라는 단어의 기원인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와 오디세우스의 아들은 당연한 멘토링의 예이다

출처 : http://sh2009.egloos.com/2419989


 이러한 여러 멘토링의 예를 보면 동서를 막론하고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 관계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부자관계를 능가할 정도의 좌주와 문생의 관계는 당연한 것이고 바울에 대한 바나바의 헌신적인 견인 역시 바울의 능력을 바나바가 믿지 못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멘토링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취업 정보 조금 더 알기 위해서, 비싼 저녁 한 번 더 얻어먹기 위해서 하는 멘티가 아니라,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먼저 간 선배를 보며 마음속으로 감동하고 존경하는 멘티가 되는 것이 진정한 멘토링 시스템의 취지에 걸맞은 멘티일 것이다. 멘토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학교에서 혜택을 준다니까 결연식에 얼굴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겪었던 어려움들을 후배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후배를 보듬는 멘토가 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