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태로 시끄럽다. 유영철 때도 그랬고, 강호순 때도 그랬다. 조두순 때도 그랬다. 연쇄살인이나 강간 등 강력 범죄가 등장할 때마다 미디어는 연일 그들의 잔혹함을 보도하기 바쁘다. 그리고 여론은 항상 사형제로 쏠린다. 인터넷 기사의 댓글에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니 이런 강력 범죄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라며 사형제 존치뿐만 아니라 집행도 재촉하고 있다. 과연 사형제를 집행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인가.


사형 집행을 앞둔 사형수를 다룬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형제 집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사형이라는 가장 강력한 방법의 처벌만이 흉악범들에게 경종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이유를 든다. 사형이 유명무실화 되면서 범죄자들에게 아무런 ‘사전 제약’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들을 사형시키지 않고 살려둠으로써 드는 제반 비용이 모두 세금에서 지출된다는 것이다. 흉악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게 ‘내가 낸 세금’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형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인권에 관한 것 역시 사형수의 인권보다는 피해자의 인권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형은 범죄자에게 교화의 가능성을 박탈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뉘우침에 대한 기회를 제거함으로써 범죄자 스스로 자신의 범죄에 대한 연민을 느낄 기회와 피해자 가족들에게 용서받을 기회 모두를 상실케 하는 것이다. 둘째로 범죄자를 죽이는 것이 과연 피해자 가족에게 완전한 위로를 제공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범죄자를 죽임으로써 일시적으로 위로와 복수감을 선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의 복수가 진정으로 뉘우친 범죄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는 것에 대한 위로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범죄 행위가 죽음과 동등한 위상을 갖고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냐는 문제이다. 살인과 사형이 동시에 이루어질 경우 그것의 결과가 ‘0’이 될지, 아니면 ‘-2’가 될 지는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반대자들의 1차적 입장이지 사형제 찬성자들의 주장에 반박하지는 못한다. 우선 사형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사형제를 통한 강력 범죄의 사전 예방 효과와 세금의 올바른 사용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강력 범죄의 사전 예방 효과는 그리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형제가 시행되던 1990년대 중반과 현재의 강력범죄, 특히 살인을 중심으로 비교해보았을 때 2000년대 이후에 살인 사건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연도별로 증감만이 있을 뿐 그 최고점과 최저점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연도별 살인 사건 발생 건수 (통계청)


두 번째 주장인 세금의 올바른 사용에 관한 것 역시 꼭 사형제 폐지만이 그 답인 것은 아니다. 우선 사형수 한 명을 수감하는 데 연간 160만원이 든다고 한다. 이 돈이 아깝다고 그냥 사형을 집행할 것인가. 그보다는 수감소 내 노동 등을 통해 160만원에 해당하는 ‘일’을 수행하게 하면 될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형제는 위에서 다뤘던 많은 이유와 찬성에 대한 반박에 의해 반대되어야 하지만 필자는 두 가지 이유에서 더욱더 강력히 폐지를 주장한다. 첫째는 ‘실수’에 관한 문제이다. 검찰과 경찰이 아무리 완벽한 증거를 찾아내고, 법관이 아무리 완벽한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인간에게 실수란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형수가 진범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형이 집행 된 후 그의 묘소에 사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한 이는 실수를 빙자한 사법 살인을 막을 수 있다는 점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과거사 규명 위원회에 의해 밝혀진 1970년대 유신 재판 당시의 정치적 판결과 그에 의한 사형은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 예이다.

두 번째 이유는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그 근본적인 목적에 있다. 경찰이 범죄자를 검거하고,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을 올바로 교화하고 건강한 시민으로 재사회화하여 사회에 다시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다. 강력 범죄자라고 해서 이 목적을 벗어나서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교화의 대상이지 복수의 대상은 아니다. 조금 양보하여 이 목적에 ‘사회 격리’라는 또 다른 목적을 추가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사형제 찬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사회에 대한 격리를 꼭 ‘죽음’으로서 이룰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여론의 문제점은 분위기에 쉽게 휩쓸린다는 점이다. 21세기 이후에 보았을 때, 조금 멀리는 효순이, 미선이 사건 이전과 이후에 대한 미국에 대한 정서를 통해서, 가까이는 노무현 대통령 집권 당시와 서거 이후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이 사형제에 관해서도 적용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범죄자에 대한 구금과 처벌, 징역 등을 행하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막무가내로 수천년 전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식의 사고를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