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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대학원에 다니는 공대생이 한 퀴즈 프로그램에서 내놓은 엉뚱한 답변이 논란거리가 되었다. ‘6.25 전쟁 전후에 각지에서 활동했던 공산 게릴라를 일컫는 말’에 대한 질문에 ‘빨갱이’라는 답변을 내놓은 것. (정답은 ‘빨치산’이었다.) 방송 직후 이러한 그의 답변은 네티즌들의 논란거리, 가십거리가 되었다. 여론의 방향은 ‘서울대 대학원생씩이나 돼서’ 빨갱이와 빨치산도 구분을 못 하냐는 것.

뭐 그래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진 빨치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몰랐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랬고, 아직도 그렇다. 하지만 대중들의 이러한 일반적 무지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초, 중학교 9년간이 필수교육이라는 이 시대에, 고등학교, 대학교가 선택도 아닌 필수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 ‘빨치산’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교육을 통해 배울 기회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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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정확한 의미가 공산 게릴라라는 것도 공산 게릴라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 수 없다. 대신 ‘빨갱이’라는 ‘속어’는 너무도 일상적인 언어로 사용된다. 어디 빨갱이 뿐인가. 진보, 좌파, 사민주의, 정치, 노동자, 운동권과 같은 사실 사전적 의미, 학문적 의미 이상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은 말에도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마치 진보라는 이름이, 좌파라는 이름이 범죄자에게 찍히는 낙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출처 : http://blog.naver.com/74615?Redirect=Log&logNo=10008613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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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레드 콤플렉스는 그를 이용하여 반-보수 세력에게 낙인을 찍으려는 기득권층이나 별로 정치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는 회색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실상 그것은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여기는, 혹은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도.

필자 역시 레드 콤플렉스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스스로에 대해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평하며, (아무리 그것이 ‘입진보’라고 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 같은 학회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절친한 친구들도 모두 비슷한 정치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좌파’라는 수식어를 붙였을 때 그것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이건 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참 애매하다.

엄청난 경제적 자본을 가지지 않는 자신이 노동자가 될 예정인 건 자명한 사실임에도 그 단어가 멀게만 느껴진다. 처음 고함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도, 고함이라는 두 글자에서 지나치게 ‘빨간’ 냄새가 나지 않는지를 고민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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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보수이든, 진보이든 아니면 중도이든 당신이 가진 레드 콤플렉스는 사회가 그대에게 씌운 온당치 않은 사고의 렌즈다.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할 것을 우리는 한 번 굴절시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렌즈를 착용한지 너무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렌즈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렌즈를 통해 느낀 굴절된 영상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좌파, 진보, 운동권이 사회에 어떤 피해를 주는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그들은 사회악이고,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도 구분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둘 다 빨갱이일 뿐이다. 운동권 총학생회 선본은 학생 복지보다 사회 운동이 먼저일 뿐이고 학교를 난리법석으로만 만들어 놓으니까 뽑지 말아야 한다. 진보적 단체는 북한의 사주를 받고 북한 공산당의 지원금을 받아서 남한 사회를 공산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빨갱이다. 비상식적이다 못해 몰상식한 담론들이 너무도 쉽게 통용되는 사회에서 진보 역시 레드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진보가 스스로를 진보라 칭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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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독립영화 <경계도시 2>는 결국 남한 사회의 진보적 지식인들조차도 레드 콤플렉스의 그늘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사상적 자유를 평생 지키며 살아온 ‘경계인’ 송두율 교수에게 ‘전향’만을 강요했던 폭력적인 사회의 모습, 그리고 그것에 대한 조건적 순응을 요구한 진보 지식인들의 모습에서 한국을 휘어잡고 있는 레드 콤플렉스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

좌우를 가르는 기준도, 누가 진보이고 누가 보수인지의 개념도 불명확한 한국 사회에서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한다는 것은 참 요원한 일이다. 그저 ‘빨갱이’에 대한 거부 반응만 남아 있는 이 사회. 이 사회 안에서는 누군가를 ‘빨간’ 색채를 띠는 어떤 것으로 낙인찍고 낙인찍히는 일, 그 무섭고 광기 어린 행위가 참 그렇게도 쉬운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