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라는 전공선택의 유예기간을 주잖아요. 그때 진정한 대학생활을 즐겨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죠. 그런데 과가 없어지다뇨? 황당하고 억울해요. 입학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동기들 사이에서 ‘전과’나 ‘반수’란 단어들이 나와요. 그보다도 사람들이 무슨 과를 나왔느냐고 물으면 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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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글로벌 융합 인재의 육성’을 목표로 내걸고 대학마다 야심 차게 도입했던 자유전공학부가 도입 4년 만에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도입 당시 자유전공학부는 입학하고 1년 동안 다양한 학문을 접하고 2학년에 올라가면서 다른 전공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학생과 학부모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전공학과 탐색을 통하여 잠재된 재능을 찾아 전공을 선택하도록 충분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계획이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다. 당시 ‘로스쿨 도입 시 법학과를 폐지하라’는 교육과학기술부 방침에 따라 로스쿨 유치에 성공한 25개 대학이 기존 법학과에 할당된 정원을 흡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했다.

대학들이 앞다퉈 만든 자유전공학부가 도입 4년 만에 폐지되고 있다. 성균관대와 중앙대가 이미 자유전공학부를 폐지 또는 다른 학제로 개편하는데 이어 연세대와 한국외대도 학부 폐지에 들어간다. 전남대도 지난 10월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폐지를 발표했다. 현재 자유전공학부가 있는 서울 내 대학교는 현재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경희대, 서울시립대 등 10여 곳에 불과하다. 대학들은 폐지 추진 이유를 ‘자유전공학부가 본래 취지와 다르게 경영학과로 진입하는 하나의 관문 또는 전문 고시반으로 변질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쏠림현상’이 가장 큰 요인, 자유전공학부=경제·경영학과?

최근 자유전공학부 폐지를 결정한 연세대는 “그동안 자유전공학부 출신 학생들의 약 66% 정도가 경영·경제전공을 택하는 ‘쏠림현상’이 나타났다”며 “폐지를 한다 해도 학생들 모두 2학년에 올라가며 각자 전공을 배정받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연세대뿐만 아니라 각 대학의 자유전공학부 출신 학생들은 취업에 유리한 경제·경영학과 쪽으로 전공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 지난 5년간 자유전공학부 '전공선택 현황' 누계 수치를 확인한 결과 전체 851명 자유전공학부 학생 중 334명의 학생이 경제학(187)과 경영(147) 전공에 몰린 것으로 드러났다. 사범대를 제외한 인문사회계열 모든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고려대의 자유전공학부 역시 상당수 학생이 경영·경제·통계 등 상경계열 인기학과를 선택했다. 작년 103명의 학생 중 경영학과 경제학을 선택해 전공을 배정받은 학생이 각 33, 통계학이 15명으로, 전체의 78.6%가 상경계 인기학과를 택한 것이다. 자유전공 개념의 스크랜튼학부를 만든 이화여대는 올해 복수전공을 정하며 경영학을 선택한 학생 비율이 31.6%였다. 반면 인문과학대를 선택한 학생은 전체의 5.4%에 그쳤다.

‘고시반이야?’ 학부의 정체성 모호

자유전공학부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지적은 도입과 함께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작년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한 김예지(가명·22) 씨는 “고시준비반 성격이 너무 강한 학부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언론을 전공하고 싶어 했던 그녀는 어학연수 등의 혜택과 여러 학문을 공부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전공학부를 택했다. “다양한 전공을 생각하고 온 친구들도 많았는데 분위기는 모든 사람이 고시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며 웃었다. 또한 “딱히 이런 걸 배운다고 내세울 게 없었다”며 “타전공 진입 제도가 없는 대학의 자유전공학부는 자체 마련한 다양한 커리큘럼을 이수하도록 하고 있는데 기존 과목들을 이것저것 끌어다 합쳐놓은 수준”이라고 아쉬워했다.

이같이 ‘학과 정체성이 없다’는 불만이 제기되자, 중앙대는 2009년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했다가 1년 만에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는 '정책학사'와 행정고시 준비에 초점을 맞춘 '행정학사'로 전공을 선택하도록 한 공공인재학부로 전환했다. 성균관대도 지난 2011년 학생과 학부모 의견을 반영해 자율전공학부를 없애고 작년 글로벌리더학부를 신설했다. 수업은 로스쿨 진학 대비 '법무 트랙'과 외무고시 등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정책학 트랙'으로 나눈 커리큘럼으로 진행된다. 최근 폐지를 발표한 외대는 “학문적 정체성이 없고,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유를 밝힌 바 있다.

학생들 “부실 운영한 대학 책임, 일방적인 폐지 황당해”

하지만 학생과 학부모들은 ‘대학이 교수진도, 커리큘럼도 확보하지 않고 방치하다 인제 와서 일방적으로 폐지하는 것은 대학이 학생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자유전공학부 12학번인 김씨는 “입학해보니 자유전공을 위한 학교 측의 프로그램이 전무했다”라며 “학사지도교수나 주임교수 등과 진솔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일 년간 단 한 번도 없다”고 지적했다.

오동하(21) 연세대 자유전공학부 학생회장은 “입학 첫해, 전공탐색 과목으로 들은 것 중 절반 이상이 상경계열 과목”이라며 “다양한 전공 탐색의 기회는 주지 않으면서 학생들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외대는 현재까지 졸업생이 단 3(학사장교 2명·외무고시 준비 1)에 불과해 학과의 비전을 판단하기엔 다소 이르다는 것이 학생들의 주장이다.

자유전공학부 폐지를 둘러싼 대학과 학생·학부모의 갈등은 심해지고 있지만, 교육부는 ‘대학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지켜보고만 있다. 학생 정원에 변동이 없는 한, 학과 설립 및 폐지는 학교의 자율적인 권한이라는 입장이다. 올해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한 이씨는 “유행에 휩쓸려 학과를 만들었다 없앴다 하는 대학 때문에 학생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될 것”이라며 “대학은 입시학원이나 고시반이 아니라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스스로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덧붙여 “교육이 사람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만큼 대학관계자들은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신중해야 할 것”이라며 “그 점에서 뚜렷한 커리큘럼과 프로그램 없이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했다가 성과가 없다고 황급히 폐지하는 학교의 결정이 아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