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4일에 광복 86주년을 앞두고 수요시위는 1,087회를 맞았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위안부 피해자는 일본 정부에 위안부 범죄 해결을 위한 7가지 사항을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를 통해 요구하고 있다. 1992년부터 시작된 1,087번의 외침 동안 7가지 요구사항은 얼마나 받아들여졌는지 알아보았다. 


1. 위안부 범죄 인정 : “일본군 요청” 인정했으나 한 발 빼는 자세

일본은 1993년 고노담화를 통해 일본군의 위안부 범죄를 인정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3명이 도쿄지방법원에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처음으로 요구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방위청 자료에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군 위안부 동원에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일본 정부는 두 차례의 진상조사를 실시했고, 1993년 고노 고헤이 일본 관방장관은 “위안소는 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 경영되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위안부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대해선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고 밝히는 등 일본 정부의 책임을 축소하려 해 문제가 된다. 


2. 진상 규명 : 일본의 꼼수, “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알 수가 없다”

일본은 고노담화를 통해 두 차례의 조사 결과를 종합해 발표하였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일본군 요청 때문에 불거졌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구체적 사안에 대해 책임을 전가하거나 확인할 수 없다고 하는 등 조사 결과는 부실하기만 하다.

◆ 위안소 설치와 운영 및 위안부 모집 책임 전가

일본은 진상조사 전 위안소는 민간업자에 운영되었다고 주장하며 책임을 발뺌했다. 이 같은 기존 입장은 고노담화에서도 번복된다. 일본은 ‘위안소의 경영 및 관리’의 “다수는 민간업자에 의해 경영되었다”며 여전히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도 “군 당국의 요청을 받은 경영자의 의뢰에 의해 알선업자들이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발표는 조사과정에서 구 내무성(내정과 민정 담당)의 자료가 제외되어 신뢰하기 힘들다.

◆ 일본군 관여 미화

일본은 ‘위안부의 관리’에 대해 “이용자에게 피임구 사용을 의무화하거나 군의가 정기적으로 위안부의 성병 검사를 행하는 조치를 하였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은 “(임신한 위안부를) 갖다 눕혀 놓고 자기가 가진 칼로 강제로 배를 갈라 아기를 꺼내 죽게 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잔인한 실상은 외면한 발표인 것이다.

◆ 위안부 총수 집계 회피

일본은 “발견된 자료 중에는 위안부의 총수를 나타내는 자료가 없다”며 위안부의 총수를 확정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조사결과에 따르면 위안부 피해자는 최소 8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에 이른다. 위안부 총수가 집계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부풀려진 수치”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정신대연구소에 따르면 일본 측의 발표는 구 내무성과 후생성이 조사 대상 기관에서 제외되어 있어 신뢰하기 힘들다고 한다. 신빙성이 떨어지는 두 차례의 조사 이후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진상 규명에 나선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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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회 의결 사죄 : 잇따른 개별적 사과, 공식 사죄는 여전히 부재

일본은 고노담화를 비롯한 몇 차례의 담화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했다. 그러나 이는 방한을 앞두고 이뤄진 개별적 사죄에 지나지 않다. 공식적인 의미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일본 국회의 의결을 받은 사죄가 필요하다.

공식적 사죄가 부재한 현재 상황으로 인해 고노담화의 의미조차 뒤집으려는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위안부가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근거가 없다”고 말했으며,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위안부는 필요에 의해 동원된 되었다”고 말해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고노담화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국회 의결 사죄가 절실하다. 그러나 극우파가 득세한 일본 국회의 현 상황 상 동의를 얻긴 현실적으로 힘들다. 


4. 법적 배상 : 한일 청구권 협정이 결정적 실수, 중재위원회 구성은 미지수

◆ 한일 청구권 협정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은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법적 배상을 회피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은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을 포함한 재산, 권리 및 청구권의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국가 간의 보상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개별적 청구권도 모두 해결된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어 개별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게 했다.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제출된 특별 보고관 Gay J. McDougall이 발표한 보고서는 해당 협정이 국가 사의 “재산” 청구권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조약일 뿐 인권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이 조약에는 “위안부” 등의 잔학 행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1995년 일본은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설립한다. 민간 차원의 모금을 통해 위안부 배상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기금 정책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 책임을 회피하고 도의적인 선에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 위안부 피해자들의 반대를 샀다. 일본의 기금 정책을 거부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시민단체들은 이에 상응하는 국민모금운동을 실시했다.

◆ 위안부 피해자 개별 소송

위안부 피해자들의 일본 법원에 개별적으로 소송을 건 사례가 있으나 시모노키 재판 1심의 부분적 승소를 제외하곤 전패했다. 당시 법원은 국제법에 의해 국가가 아닌 개인이 소송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정인섭 서울대 법학과 교수는 “피해자의 직접 소송은 시일도 많이 걸릴뿐더러 승소한다 해도 소송의 결과는 해당 원고에 한하여 적용될 뿐”임을 지적했다. 정 교수는 위안부 피해자 전체에 대한 해결을 위해선 “일본이 특별법 제정해 공식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전의 판결에서 입법 부작위 책임(전후 3년 내에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은 책임)이 자국민에 한정된 것이라고 주장해 특별법 제정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중재위원회 구성

2011년 8월 헌법재판소는 한일 청구권 협정의 “양국 간 협정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을 때 외교 경로를 통해 해결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한국인 1명, 일본인 1명, 한일 양국이 합의한 제3국인으로 구성된 중재위원회 결정에 따른다”는 조항을 정부가 지키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동아일보의 보도에서 외교부 관계자는 "언제 중재위 회부를 일본에 통보할지 검토 중"이라면서도 "외교 경로를 통한 해결 노력이 더는 어렵다는 결단을 내릴 시점이 언제인지 판단하기는 무척 어렵다"고 밝혔다. 일본이 중재위 구성을 거부할 경우 실효성이 없어 외교부는 전전긍긍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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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책임자 처벌 : C급 전범인 위안부 범죄자는 처벌 안 된 상태

일본의 전범 처벌이 이루어졌던 도쿄재판에선 위안부 범죄자의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안부 범죄자는 C급 전범(인종적 이유 등으로 대량 학살, 혹사, 노예화하는 등의 반인도적 행위)에 해당하는데 도쿄재판에 기소된 25명은 A급 전범(침략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수행했거나 이에 가담)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C급 전범의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엔고문방지위원회에서는 지난 6월 위안부 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과 가해자 처벌을 권고했으나 일본은 무시로 일관하는 중이다. 


6. 역사 교과서 기록 : 그나마 긍정적, 새역모 논란은 여전

서울신문에 따르면 올해 검정을 통과한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12종 가운데 9종이 위안부에 관한 내용을 게재했다고 한다. 서울신문은 “위안부 동원에 대한 일본군의 책임을 비교적 분명히 하고 사죄와 배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를 암시적으로 시사하는 기술이 증가해 일부 내용이 개선된 점이 눈에 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한국정신대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선 위안부 문제가 여전히 기술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일본의 교과서의 우경화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건 1997년 후지오카 노부카스 도쿄대 교수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다. 극우 성향을 지닌 새역모는 1999년 문부성에 ‘자학 사관’의 극복을 위해 위안부에 대한 역사 기술의 삭제를 주장한다. 2001년 3월엔 이들이 만든 역사교과서가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을 통과해 논란이 되었다.


7. 위령탑 및 사료관 건립 : 극우 세력 위협으로 시기상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위령탑 및 사료관 건립은 일본 사회 내에선 아직 추진된 바가 없다. 일본 내 양심 세력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추진된 적이 없는 것은 극우 세력의 테러의 위협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 테러’를 자행한 극우 세력의 행보만 보아도 일본 사회 내 위안부 피해 교육 추진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정대협은 모금을 통해 미국 등 여러 국가에 위안부 위령탑을 설치하며 국제 사회의 힘을 모아 압박을 추진하는 중이다.  

위안부 할머니의 1,087번의 외침에도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이 와중에 박근혜 정부는 ‘여성’ 대통령임을 내세웠음이 무색하도록 위안부 문제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나 박근혜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에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나설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의 부친이자 정치적 기반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일 청구권 협정을 성사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우익 인사들이 위안부 피해자 배상 책임을 회피하는데 용이하게 쓰이고 있다.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라 구성하기로 한 중재위원회 구성은 2년째 미뤄지고 있다. 지난 6월 여성가족부에서 발족한 ‘민관 위안부 피해자 진상 규명 TF’는 진행 소식이 없으며 조윤선 장관이 위안부 할머니와 식사했다는 기사만 뜰 뿐이다. 위안부 할머니의 7가지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의 보다 책임감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