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8대 스펙의 시대다. 고용노동부가 최근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2년엔 5가지였던 취업 필수 스펙(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이 2012년에는 8가지로 늘어났다. 봉사, 인턴, 수상경력이 추가된 결과다. 제대로 된 스펙 하나 갖추기도 어려운데 8가지나 신경을 써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엄청난 대업을 이루고자 스펙에 목을 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먹고 살만한 직업을 얻기 위함이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진 세대’라는 말까지 생겼지만, 청년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필수 스펙이 늘어났다. 늘어나는 필수 스펙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청년들의 심리적 부담도 커졌다. 경제적 부담 또한 너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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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에게는 경제적 부담인 필수 스펙이 다른 누군가에겐 돈벌이 수단이다. 토익 시험 주관사인 YBM 한국토익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연간 200만명 정도가 응시하는 토익 시험의 응시료는 4만 2천원이다. YBM은 토익 응시료로만 1년에 800억원이 넘는 막대한 수입을 얻는다. 지난 10월 23일 참여연대와 청년유니온은 YBM의 불공정행위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 따르면, 물가가 46.7% 오르는 동안 토익 응시료는 61.5%나 올랐다. 응시자 수가 늘어나면 1인당 문제지 인쇄비와 고사장 대여비는 줄어드는 데도 응시료는 물가보다 더 많이 올랐다는 비판이었다. 청년들이 토익 시험을 봐야만 하는 현실을 악용한 불공정행위라 할 수 있다.

<스펙을 이기는 자기소개서>란 책이 있다. 책 소개에는 “여러분의 자기소개서 작성에 큰 힘이 되어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자기소개서를 쓰는 요령을 아무리 익힌다 한들 스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큰 소용이 없다. 성장 과정을 말하든, 성격의 장단점을 말하든 8대 스펙을 들먹이며 말해야 한다. 기업 인사팀에서 모든 응시자의 자기소개서를 꼼꼼히 읽어볼지도 의문이다. 어찌 됐던 청년들은 희망의 끈을 한 줄기라도 더 잡아보고자 자기소개서를 더 잘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스펙을 이기는 자기소개서>와 같은 책도 사들이게 된다. 조선일보의 10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취업 자기소개서 관련 신간 책은 2011년 12종, 2012년 14종, 2013년 17종으로 꾸준히 늘었다. 매출도 함께 증가했다. 자기소개서 시장의 확대는, 청년들의 취업난이 한편에서는 돈벌이 수단이 되는 또 하나의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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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피땀을 흘려가며 쌓는 스펙으로 돈벌이가 이뤄지는 현실은 너무나 암담하다. 토익 학원, 자기소개서 관련 서적 등이 많아지고 있다. 스펙 쌓기에 도움이 되는 것들 같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청년들을 상대로 한 돈벌이 수단이다. 이러한 돈벌이를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양질의 일자리는 줄어드는데, 취업을 위해 투자하는 돈은 늘어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취업에 도움이 될지 불확실한데도, 일단 스펙을 많이 쌓아보고자 하는 청년들의 동분서주가 애처로울 뿐이다. 스펙 쌓기에 돈을 붓는 청년들은 그나마도 나은 처지라 할 수 있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청년들은 스펙 쌓기에 돈을 부을 수조차 없다. 계급 사다리를 올라가기는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이렇게 암울한 현실에 처한 청년들에게 “거침없이 달려라”느니 “자기계발에 미쳐라”느니 하는 말들은 제발 그만 건넸으면 좋겠다. 청년들이 필요로 하는 건 말뿐인 위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