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가 정부로부터 '노조 아님'을 통보받은지 1달이 지났다. 전교조, 정부, 전문가, 국제단체까지 나서 법리적 문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법원은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여 전교조는 당분간 노조 지위를 유지하게 됐다. 그러나 전교조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집행정지 결정이 '법외 노조'결정에 대한 미봉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교조는 탄생부터 줄곧 한국 사회와 한국의 교육 문제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전교조를 둘러싼 '참교육'과 '이념편향수업'이라는 두 시각 속엔 사회의 다양한 모습이 응축되어 있다. 이번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도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봐야 옳다. 고함20은 전교조를 바라보는데 도움이 될 더 큰 밑그림을 4회에 걸쳐 준비했다. 


 
‘전교조’의 정식명칭은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이다. 이는 ‘교사’가 아닌 ‘교직원’을 포괄하는 의미를 담은 명칭으로, 교육활동을 하는, 즉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학생을 함께 책임지는(영양사, 행정직 직원 등)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단체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학교에 종사하는 사람 중, 교감/교장을 제외하고는 조합에 가입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현행법상(교원노조법), 현직 교원들만이 노조 가입 대상으로 인정되므로, 실제적인 운영은 현직 교원들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학교의 비 정규직 등 가장 열악한 교육환경에 처해 있는 이들은 현재 법적으로 노조 가입대상에 속하지 않는다.


전교조의 설립부터 합법화까지


1960년, 4.19혁명의 결과로 민주 노조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전교조는 설립된 교원 노조에서 출발했다. 당시 이승만 독재 하에 강요되었던 교육을 거부하면서 총 8만 명의 교원들 중, 4만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그러나 군사 정변으로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교원노조는 좌경연공세력(좌익사상을 가지고, 공산주의와 연합하는 세력)으로 매도되며 불법노조가 되었다. 노조에 가입한 4만 명의 교사 중 약 1500명의 교원이 해직되었고, 54명이 10~15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또 한번의 군부독재가 시작되었다. 교사의 역할은 오로지 나라가 원하는 교육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었다. 교사들이 촌지를 받는 것이 관행화 되는 등 학교 내부 또한 부패하였다. 정권의 시녀역할과 촌지에 시달리는 부도덕한 상황에 대해 교원들은 자발적으로 교육 민주화 선언을 했고, 87년도에 전교협(전국교사협)을 설립하였다. 87년 민주화 운동 과정 중, 이들은 ‘정부(사용자)의 요구대로 죽은 교육을 할 수 없다. 살아있는 교육을 하고, 촌지를 거부하며, 우리가 원하는, 아이들이 살아 숨쉬는 교육을 하겠다’며 스스로 노동자를 표방하면서 전교조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89년도 5월 28일(노태우 정권) 연세대학교에서 정식으로 출범을 선언하였다.

전교조는 출범 후 즉시 정부에 의해 불법 단체로 간주되었다. 정부는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으면 즉각 해임을 하겠다며, 탈퇴 각서를 각 학교 현장의 모든 선생님들에게 배포했다. 당시 문교부에서는 “전교조 식별법”이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문을 내려보냈다.

<전교조 식별법>
1)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2) 학급에서 아이들과 신문을 내고 글을 받아서 문집 활동을 하는 교사
3)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과 상담을 자주 하는 교사
4) 동아리에서 신문, 민속, 탈춤, 민요, 노래, 연극 등을 가르치는 교사: 당시에 불온하다고 여겨졌다.
5)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
6) 아이들의 자율성, 창의성을 높이려는 교사
7)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 진보성향, 운동권 출신이 이 시기에 많이 입고 다녔다.
8) 직원 회의때, 교장선생님의 말에 원리원칙을 따지며 토를 달고 발언하는 교사(일명 벌떡교사)

탈퇴 사인 하나에 교직의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었고 전교조 본부에서도 사인을 하지 않도록 강요할 수 없었음에도, 1600 여 명이 각서에 탈퇴 사인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스란히 해임징계를 받았고, 그 후 생계 유지를 위해 외판원이 되거나, 학교앞 문방구 등을 운영하는 등 어려운 삶을 지냈다.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면서, 탈퇴를 전제로 한 선별복직의 문이 열렸다.(해임되었지만, 전교조를 탈퇴하면 다시 학교로 복직시켜주었다.) 당시 생계자체에 어려움이 많던 상당수의 인원이 복직 신청을 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사회적 합의기구의 성격을 가진 제 1기 노사정 위원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전교조 합법화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고, 노사정 위원회의 합의에 의해서 1999년 7월 1일, 전교조가 합법화 되었다. 합법지위를 가지게 되자, 전교조는 한 때 조합원 수가 6~9만에 이를 정도로 대중적인 조직으로 바뀌게 되었다.

잘못된 교육 정책을 비판하는 유일한 단체, 전교조

 전교조의 실체는 본부에 있지 않으며, 선생님 한 사람 한 사람이 전교조 자체이다. 이들은 언론기관이 따로 있지 않으며, 각 학교 현장에서 선생님들이 전교조의 강령에 따라 참교육을 실천하고, 목소리를 내며 활동하고 있다. 전교조 조합원들의 활동은 단순하다. 첫째, 현장에서 참교육 실천을 하고, 그것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는 것, 둘째, 참교육을 방해하는 잘못된 관행, 제도 등을 고치기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교조가 말하는 “참교육”이란 무엇일까? 사실, 그들이 말하는 ‘참’교육이란 기본적인 “교육”의 본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각종 정책에 밀려 뒷전이 돼버린 ‘교육’과 구별하기 위해 굳이 “참교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과 학교의 현실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 탓의 대부분은 매년 잘못된 교육 정책을 펼치고, 실패해온 정부에 돌릴 수 밖에 없다는 것 또한 모두가 인정해야할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입장을 앞장서 대변하며, 잘못된 교육 정책에 대해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유일한 단체가 바로 전교조이다. 때문에 이들은 오히려 정부 및 보수 단체의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을 전교조에 빼앗길 수 없다" 전교조는 빨갱이·종북?

2004년, 참여정부(노무현 정부) 시절, 민주적 사립학교법(사학법)이 개정되었다. 사학법은 당시 크게 부패하였던 사립학교를 투명하게 운영하기 위해, 개방이사제로 대표되는 중립적인 인사를 정부에서 세워, 사립학교 운영에 대한 약간의 감시와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의 법안이었다.

이는 당시 이사회의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법안이 상정, 통과 되자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여러번에 걸친 대규모 장외집회를 열었다. 이 때의 장외집회를 통해 가장 많이 거론됐던 단체가 ‘전교조’이다. “민주적 사립학교법이 개정되면, 사학을 전교조가 접수한다. 우리 아이들을 전교조에 빼앗길 수 없다.”라는 발언이 무수히 쏟아졌다. 학교 현장이 민주적인 분위기로 바뀌면서 전교조 선생님들이 목소리를 높일 것이고, 그들의 세력이 커지게 될 것이므로, 사립학교들이 전교조 뜻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들은 보수언론과 함께 전교조를 한 마리 해충에 비유하며, 온 산을 붉게 물들인다며 매도했다.

그러나 당시 이 법안을 반대했던 박근혜 및 새누리당 당원들 중 상당수가 사립학교 재단 이사장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장외집회를 여는 그들이 진심으로 걱정했던 대상이 ‘우리 아이들’이었는지는 아직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사실상 법안은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당시 사립학교 이사회는 완전히 족벌체제로, 친인척들로 꾸려지는 것이 관습이었고, 사립학교 교사들은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교육을 해야 하는, 과거 군부독재 시절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사학법은 이에 대한 약간의 감시와 조치를 취하는 정도에 그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전교조는 보수세력에 대립되는 진보, 나아가 빨갱이, 종북 세력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졌고, 그들의 본래 정체성인 참교육은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선거철만 되면 거론되는 “전교조”


그 이후부터, 선거철만 되면 '전교조'는 늘 세간에 언급되었다. 특히 교육감 선거 때가 되면, 약간의 진보성을 띈 교육감 후보들은 무조건 전교조와 연관되며, 빨갱이 혹은 종북으로 매도되기 일쑤였다. 보수세력은 선거전략에 전교조를 활용하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전교조는 자신의 성향을 확실히 하는 이데올로기적, 진보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나는 전교조와 달라”라는 식으로 자신이 '그 쪽' 세력이 아님을 드러내는 하나의 단어로 자리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