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어였던 ‘잉여’가 이제는 20대 청년을 일컫는 말로 보편화됐다. 다른 누군가가 잉여라고 부르기 이전에, 20대 청년들은 스스로를 잉여라고 칭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아무 스스럼없이 잉여라는 말을 꺼낸다. 올해 6~7월에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0~30대 26%는 “현대사회에서 잉여세대로 불릴 만큼 생산성이 없다”고 답했다.

올해 말에는 ‘잉여 청년’의 모습을 그려낸 영화 3편이 연이어 개봉됐다.(10월 24일 개봉 <코알라>, 11월 14일 개봉 <잉투기>, 11월 28일 개봉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세 영화를 만든 감독들 또한 20대 후반~30대 초반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코알라> 김주환(32) 감독, <잉투기> 엄태화(33) 감독,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이호재(29) 감독) 잉여 청년에 대한 영화를 잉여 청년들이 직접 만든 것이다. 잉여 청년을 주제로 삼았지만, 영화마다 보여주는 잉여 청년의 모습은 조금씩 달랐다. 세 영화를 통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잉여 청년들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코알라> : 밤낮없이 일하고, 쏘맥에 꽐라가 돼도 현실은 그대로


<코알라>의 두 청년, 동빈과 종익은 배우 학원에서 만나 친구가 되지만, 두 사람 모두 배우의 꿈을 이뤄내지 못한다. 동빈은 배우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고, 뒤늦은 나이에 마음에도 없는 회사에 다닌다. 종익은 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버텨보지만, CF 아르바이트만 전전할 뿐이다. 그러던 두 청년은 합심해서 단지 넉넉히 먹고 살기 위해 창업에 뛰어든다. 그들은 햄버거에 남다른 애착이 있는 것도 CEO의 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수제 햄버거 가게 창업에 도전한다.

동빈과 종익은 수제 햄버거집 창업으로 성공을 거두고자 밤낮 없이 열심히 일한다. 낮에는 수제햄버거집을 운영하고, 밤에는 햄버거 패티 공급비와 가게 임대료를 메꾸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렇게 해도 햄버거 패티 공급비를 감당할 수 없자 패티를 직접 만들고, 배달 서비스를 시작하고,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기까지 한다. 두 청년이 다방면으로 노력하며 새로운 메뉴는 큰 인기를 얻고, 입소문이 퍼지면서 수제 햄버거집의 매출은 올라간다. <코알라>는 청년 창업가의 성공담으로 마무리될 것 같았다. 하지만 가게 임대료가 오르고, 공급되는 패티를 쓰라는 압박이 이어진다. 결국 두 청년의 수제 햄버거집 창업기는 실패로 끝난다.


<코알라>의 두 청년은 아무런 사치도 부리지 않고 일만 한다. 힘들 때면 쏘맥을 마구 마시며 꽐라가 된다. 잠시나마 힘든 현실을 잊어보기 위함이다. 얕은 잠을 자고 일어나서 먹는 아침 식사는 항상 라면이다. 한숨이 나오는 고달픈 현실이지만, 그들은 서로의 얼굴에 낙서를 하며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두 청년은 근근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그친다. 그들이 바라던 90평짜리 집의 꿈은 요원하고, 오히려 작은 전세방에서 나가야 할 위기에도 처한다. 청년들이 열심히 노력해도 크게 바뀌는 것은 없다는 현실을, <코알라>는 유쾌하게 풀어냈다.

<잉투기> : 인터넷 잉여들의 오프라인 적응기


<코알라>와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에 등장하는 잉여들이 <잉투기>의 잉여들과 만난다면, 자신을 잉여라고 선뜻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잉투기>에 등장하는 청년들은 잉여 그 자체다. 그들은 딱히 하는 일이 없다. 현실 세계에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잉투기> 잉여들의 주된 활동 무대는 인터넷이다. 인터넷에 상주하면서 게임을 하고, 때로는 댓글로 키보드 배틀을 펼치는 게 그들의 일과라면 일과다. <잉투기>의 주인공 칡콩팥(태식)도 인터넷 잉여 중 한 명이다. 그런데 게임 아이템을 거래하러 간 자리에서 칡콩팥은 젖존슨에게 공격을 받는다. 젖존슨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칡콩팥은 온라인에서 벗어나 오프라인 세계로 나온다.

<잉투기>는 감독의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같지만, 놀랍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칡콩팥과 젖존슨의 키보드 배틀은 디시인사이드 격투 갤러리(격갤)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인터넷 잉여들은 상상 속이 아닌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잉투기 또한 실제로 격갤에서 개최했던 격투기 대회다. 잉투기를 주관하는 체육관 관장은 잉투기가 ‘잉여들의 격투기’를 줄인 말이 아니라, ‘ing투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직 싸우는 중이라는 뜻이라며, 칡콩팥에게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지 말고 링 위에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조언한다. 칡콩팥은 젖존슨의 행방을 찾는 동시에 체육관에서 격투기를 연습한다. 칡콩팥은 격갤에서 벗어나 현실의 태식으로 살아가며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어머니에게 말하게 된다.


칡콩팥과 붙어 다니는 또 한 명의 잉여, 희준의 존재는 인터넷 잉여에 대한 편견을 깨준다. 인터넷 잉여들은 찌질한 언행만큼 외모도 찌질할 거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희준은 너무나 말끔하게 생겼다. 게다가 집안이 부유해서 자동차도 끌고 다닌다. 킹카라고 해도 믿을 조건을 갖춘 희준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잉여의 본색을 조금씩 드러낸다. 희준도 닉네임 ‘쭈니쭈니’를 사용하는 격갤러였고, 칡콩팔과 같이 다니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잉여였다. 그랬던 희준은 체육관에 다니면서 칡콩팥과 다니는 시간을 줄이고, 삶의 의욕을 찾아간다. 희준은 잉투기 대회에 출전해서 실컷 얻어맞기만 하고 코피가 터지기도 하지만,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처럼 웃는다. 체육관에 붙어있는 “계속하는 것은 힘이 된다”는 격언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키보드 배틀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잉투기’가 인터넷 잉여들에게는 현실에서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인 것이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 마냥 행복해 보이는 유럽 여행기 이면에 담긴 청년들의 자화상


단돈 80만원으로 1년간 유럽을 여행한다? 누가 들어도 가슴이 설렐 만한 이야기를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의 주인공 호재, 현학, 휘, 하비는 실제로 경험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던 청년 4명은 등록금을 마련하고자 영상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나 등록금의 절반 정도 밖에 벌지 못하자, 그 돈으로 유럽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민박집, 호스텔의 홍보 영상을 찍어주고 숙식을 제공받으면 돈 없이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더해지며, 1년간 유럽에 머무르자는 당돌한 목표를 세운다. 팀 이름을 SURPLUS(잉여)라 지은 청년 4명이 유럽에서 겪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으로 재탄생했다.


무임승차와 히치하이킹을 하고, 외진 공터에 친 텐트에서 잠을 자가며 SURPLUS는 파리에서 로마까지 힘들게 이동한다. 그런데 홍보 영상을 찍어달라고 요청한 한인 민박집 사장님은 거지꼴의 SURPLUS를 보곤 패스트푸드만 사준 뒤 사라진다. 그렇게 SURPLUS의 꿈은 좌절되는 듯했으나, 외국인이 운영하는 호스텔에도 홍보 영상을 찍어준다는 메일을 보내면서 상황은 급반전된다. 처음으로 만든 호스텔 홍보 영상이 대박을 치면서 숙박 업계에 소문이 퍼진 것이다, 통조림과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SURPLUS는 레스토랑 풀코스 세트를 먹는가 하면, 매일같이 스테이크를 구워먹게 된다. 비행기 표를 제공해주며 홍보 영상을 만들어달라는 영국 호텔의 요청을 받고, 어렸을 적부터 동경하던 영국 밴드의 뮤직비디오를 찍어주기에 이른 SURPLUS는 여행에서 목표했던 미션들을 모두 이뤄낸다.

‘유럽’과 ‘여행’이라는 낭만적인 두 키워드 때문인지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 보여주는 청년들의 모습은 마냥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모습과 마주할 수 있다. SURPLUS는 호스텔 홍보 영상을 만들어 숙식을 제공받았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그들은 머리를 짜내고 영상을 공들여 편집해서 영상을 만들었지만, 돈을 벌 순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것의 반복이었다. 이런 상황이 영화 후반부에는 더 심해진다. 뮤직비디오를 찍으려고 호스텔이 별로 없는 곳에 정착한 SURPLUS는 숙식비를 벌기 위해 식당에서 일을 한다. 12시간 가까이 일을 해야 했고, 하마터면 뮤직비디오 작업을 못 끝낼 뻔했다. 한때는 화려했던 SURPLUS의 여행의 마지막은 나침반에 의존해 무작정 걷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에서 유럽을 여행하는 청년들의 화려하면서 고달픈 모습은, 한국 청년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도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