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생들에겐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대자보’가 다시금 대학가를 뒤덮고 있다. 안녕하지 않다고 말하는 대학생들의 대자보가 고려대, 성균관대, 용인대, 중앙대, 상명대, 인천대, 연세대 등지에서 최근 며칠 사이 연이어 게재됐다. 다른 대학에서도 대자보를 붙이려 준비하는 대학생들이 있어, 대자보 릴레이는 다음 주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대자보 릴레이의 출발점은 고려대 경영학과 주현우씨가 12월 10일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 붙인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였다. 주현우씨는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에서 파업에 참여한 철도노동자들의 직위해제,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밀양 송전탑 건설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대자보의 말미에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시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닐지 여쭐 뿐입니다”라고 물었다.

대자보 사진은 1600번 가까이 공유됐다. ⓒ김형민씨 페이스북(facebook.com/profile.php?id=100001055837349)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주현우씨의 질문을 들은 대학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대자보를 찍은 사진은 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대자보를 소개한 한 페이스북 게시물은 1600번 가까이 공유됐고 ‘고려대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는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로 잠시 오르기도 했다.

뜨거운 반응은 오프라인에서도 이어졌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응답하는 대자보가 주현우씨의 대자보 옆에 붙은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믿을 수 있게 해주었던 사람들이 이젠 거의 다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나는 안녕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시험을 치고, 영어를 공부해도 내가 사는 세상은 나아질 것 같지 않습니다”, “누군가 내게 안녕하냐고 묻는다면, 안녕하지 못한다고 말하렵니다. 더 이상 분노를 유예하지 않으렵니다” 등의 대답이 담긴 대자보로 몇몇 고려대 학생들은 분노를 표출했다. 안녕하지 않다는 응답이 계속되며, 고려대 정경대 후문은 대자보 20여 개로 가득 찼다.

20여 개의 대자보로 가득 찬 고려대 정경대 후문 ⓒ주현우씨 페이스북(facebook.com/chance2change)


소소한 응원 또한 끊이질 않았다. 대자보 밑에는 응원의 목소리가 담긴 작은 포스트잇이 붙었고, 대자보 관련 SNS 게시물에는 공유 및 댓글이 넘쳐났다. 국토교통부의 수서발 KTX 분할 비판 대자보를 붙인 고려대 생활도서관의 한 페이스북 게시물은 2만 건이 넘는 좋아요를 기록했다.

대자보 밑에 붙은 포스트잇 ⓒ주현우씨 페이스북(facebook.com/chance2change)


안녕하지 않다는 대자보의 모임은, 안녕하지 못한 고려대 학생들의 모임으로 발전했다. 주현우씨는 12월 12일 오전 8시쯤부터 일인시위 피켓팅을 시작했다. 주현우씨의 모습을 본 몇몇 고려대 학생들은 따뜻한 음료수 및 손난로를 건넸다. 발걸음을 멈추고 주현우씨와 함께 피켓을 드는 학생들도 있었다. 10시간 동안 피켓팅이 이어지며 피켓팅을 하는 인원은 10여 명으로 늘어났다. 12일 저녁 8시경에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페이스북 페이지가 만들어 졌고, 6시간 만에 1400여 명이 페이지 좋아요를 클릭했다. 고려대 대자보의 파장이 커지면서 13일 오후 2시 30분쯤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지는 좋아요 5000개를 돌파했다.

피켓팅 중인 안녕하지 못한 학생들 ⓒ주현우씨 페이스북(facebook.com/chance2change)


13일에는 다른 대학에서도 대자보가 등장했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최종학씨는 <성균관 학우 여러분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게재했다. 최종학씨는 국가기관의 대통령 선거 개입, 전교조 법외노조화, 파업 참여 철도노동자 7000여명의 직위해제 등의 문제를 거론하며 “상식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지고 있는 시절입니다. 그간 안녕하지 못한 세상을 보면서 안녕하고자 했던 제가 부끄러워집니다”라고 말했다.

용인대 중국학과 홍상우씨도 안녕하지 않다며 대자보로 응답했다. “정부와 자본주의에 반대하면 모두 불법이고 종북이며 사회불만세력이 되어버리는 것”이라며 “날씨만큼 우리의 민주주의도 춥습니다. 안녕치 못합니다. 우리가 계속 지금처럼 학업과 취업을 핑계로 무관심하고 모른 척 한다면 우리 또한 안녕치 못한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성균관대에 붙은 대자보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facebook.com/cantbeokay)


대자보 릴레이는 중앙대에서도 이어졌다. 중앙대 27대 국어국문학과 학생회장 표석씨는 <정치적인 공간의 복원을 염원하며>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게재했다. 자신을 중앙대 공인 운동권 중 한 명이라 소개한 표석씨는 “하루에도 수천 명씩 탄압받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무수한 ‘나’들은 서로의 죽음에, 서로의 배제에 조금씩 천천히 눈을 감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의 재구성이 필요하다”며 “다시금 우리의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정치적인 공간의 복원을 염원합니다”는 말로 대자보를 마무리했다.

상명대학교에서도 12학번 한 학생이 "안녕하지 못한 나라를 외면해가면서까지 혼자 안녕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다시 16살 촛불을 들었던 안녕하지 못한 사람으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라는 말이 담긴 대자보를 붙였다.

인천대학교에 붙은 대자보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facebook.com/cantbeokay)


인천대학교에서는 12학번 학생 3명이 함께 <인천대 학우님들은 안녕하십니까?>라는 대자보를 게재했다. 이들은 "이제껏 침묵해왔다는 것"이 부끄럽다며 "고려대 학우님의 외침이 단순히 고려대로만 끝나게 된다면, 그 부끄러움은 더 커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고려대 학우님의 외침은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질문"이라 덧붙였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한 학생도 대자보 릴레이에 참여했다. 이 학생은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사회 앞에 보란 듯이 일어나 나를 안녕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에 떳떳히 고하고 싶다"며 "14일 낮. 시간 나는대로 바로 행진에 참여합니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 외의 다른 대학에서도 대자보가 계속해서 붙고 있는 상황이다. 전국 각 대학의 대자보는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facebook.com/cantbeokay)로 모이고 있다.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facebook.com/cantbeokay)


한편 같은 날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서는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페이스북 포토서명 이벤트가 진행됐다. “[ ]해서 나는 안녕치 못합니다”의 빈칸에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적고 사진을 찍는 이벤트였다. “방학인데 놀지 못해서”, “불투명한 미래,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초조해서”, “알바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최저임금이 너무 낮아 돈이 부족해서”, “방값이 비싸서”, “시대의 모순과 억압 앞에서 너무 작은 존재이기 때문에” 등 대학생들의 어려운 현실이 담긴 갖가지 이유가 쏟아졌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은 12월 14일 오후 3시에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서 또다시 모일 예정이다. 왜 안녕하지 못한지 함께 이야기하는 일종의 성토대회를 가진 뒤, 민주노총 결의대회 및 철도민영화 반대 범국민대회가 진행되는 서울역 광장까지 행진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