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 하십니까"로 첫 글귀를 시작한 한 대자보는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사회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전국 각지의 대학생들은 ‘안녕하지 못한’ 대자보를 자신의 학교에 내걸으며 응답했다. 언론도 과열 취재 양상을 보이는 걸로 봐서 정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다.

흥미로운 현상이다. ‘감성적이다’ 혹은 ‘선동적이다’라는 비판도 있지만 어쨌건 이 대자보로 인해 나타난 현상 자체만 놓고 보면 굉장히 주목할 만하다. 동시에 이 대자보는 기존 청년 운동권의 접근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했다. 확실히 2013년의 사회운동의 양상은 80년대의 움직임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조직이 개인을 설득하고 끌어들여 더 큰 조직적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 80년대 20대 운동의 스타일이라면, 2013년의 20대 운동은 파편화된 개개인이 큰 담론 차원에서의 조직을 형성하고, 조직적 행동을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일상생활 내에서의 개인적 차원의 운동으로 다시 스며드는 양상이다.

이는 현재의 20대라는 세대가 살아온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대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컴퓨터를 접했고, 사이버 공간의 커뮤니티에 몸담으면서 자신의 특성에 맞는 커뮤니티 이곳저곳을 확보하는 식으로 발전해왔다. ‘정치’라는 특화된 커뮤니티보다 개인적 취미와 관련된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정치문제가 첨가되는 식이다. 따라서 ‘정치’만을 위한 운동은 당연히 지속성이 떨어진다. 일상생활과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할 순 없지만 적어도 20대에 깔려있는 일반적인 기제는 정치와 일상생활은 약간 떨어져 있는, 협소한 의미의 정치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 응답한 '안녕치 못한' 대자보가 전국 각지의 대학교에 걸렸다. ⓒ 머니투데이


특정 당에 속해있는-표면적으로 속하지 않더라도 관련되어진- 학생운동권이 학생들에게 외면을 받는 것도 20대의 일반적인 의식과 맞닿아 있다. 일반적인 20대는 더 이상 정치만을 위한 운동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또 할 수 없다. 많은 이들이 말했듯이 신자유주의가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경쟁에서의 탈락은 곧 나락이라는 풍조 속에서 형성된 정치참여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동시에 정치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는 ‘정치적’이라는 단어 자체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총학이 특정 정당과 관련되지 않길 요구한 것도 이러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씨의 대자보에 대한 반응처럼, 대다수의 20대는 커뮤니티에서 간간히 나오는 사회문제에 대해 불편함을 느낄 때가 한 번쯤은 있었다. 누군가 더 나서지 않으면 큰일 날 수 있겠다는 불편함. 그러나 ‘내가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회의감, 정치권은 믿을 수 없다는 혐오감, 당장에 닥친 경쟁의 압박감 속에서 그 불편함은 꺼내졌다 묻히길 반복했다. 그런데 한참을 묻어놨던 불편함이 ‘안녕들 하십니까’의 양심선언과도 비슷한 대자보로 인해 더 이상 마냥 묻어둘 수는 없다는 하나의 의식으로 떠올랐다. ‘나만 이런 불편함을 느낀 게 아니구나’라는 안도가 ‘나도 이젠 말해봐야겠다’는 반성으로 이어지면서 폭발적인 힘으로 분출됐다. 

‘안녕들 하십니까’는 파편화된 20대가 모여 만든 비가시적 연대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러한 연대는 그 자체만으로는 지속성이 높지 않다. 잠깐의 '반짝 이벤트'로 끝날 가능성도 높다. 뚜렷한 반대의 대상이 있거나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목적의식을 설정한 것이 아니라, ‘안녕치 못한’ 상황을 묵과한 자조적 반성이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한계가 동시에 20대 운동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제 20대는 끊임없이 ‘안녕치 못한’ 상황을 명확히 인식할 테고 분노와 자기반성을 반복하면서 나의 경계내에서 할 수 있는 최적의 운동방식을 찾아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녕들 하십니까’ 연대가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잠깐의 움직임으로 끝날지, 혹은 한계를 기회의 바탕으로 삼아 자신만의 특화된 운동법으로 발전해나갈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그래도 발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싶은 이유는 변화는 ‘자기고백’에서 시작한다는 사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