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총서가 출간됐다. 동시대 시각 문화와 타이포그래피, 인문학 관련 책들을 다루는 출판사 ‘워크룸 프레스’가 야심차게 펴낸 문학 총서 ‘제안들’이다. 책을 좋아하는, 특히 자신만의 책장을 꾸리거나 관심 있는 작가에 관해 은밀한 탐구를 벌이기 좋아하는 독자라면 자연스레 눈길이 갈 만한다. 깔끔한 디자인에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까지, 매혹적이다.



2월 5일, <꿈>(프란츠 카프카, 배수아 옮김), <불가능>(조르주 바타유, 성귀수 옮김),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토마스 드 퀸시, 유나영 옮김) 총 3권이 한 번에 출간되었다. 7일에는 서점 더북소사이어티에서 출간 기념 모임이 열렸고, 19일부터는 각 번역자의 이야기를 듣는 토크(‘번역과 말’)가 진행 중이다. 30권을 웃도는 총서 목록이 편집자의 손 안에서 비밀스럽게 대기 중이며, 이 중 올해 출간 예정된 10권의 목록은 발표됐다.
 
1. ‘제안들’은 숨은, 가치 있는 작품들을 펴낸다. 작가들의 비밀한 작품들, 마땅히 소개되어야 함에도 국내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았던 책들로 엄선된다.
2. ‘제안들’은 연결된다. 여러 언어로 글을 쓰는 미지의 작가들 혹은 친숙한 이름의 낯선 작품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교차한다.
3. ‘제안들’의 경계는 느슨하다. 소설과 산문, 산문과 시, 비평과 전기, 일기와 서간을 넘나드는, 그 구분을 무색케 하는 글들이 주를 이룬다.
4. ‘제안들’은 정교한 번역을 지향한다.
5. ‘제안들’은 탁월한 번역 후기를 싣는다.

이 당돌한 조건들을 보시라. 여러 날을 벼른 듯 야심차게 준비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서 궁금해졌다. 왜 이 기획을 꾸리게 되었고, 무엇을 지향하며, 어떠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제안들’의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담당하고 있는 디렉터, 워크룸 프레스 김뉘연 편집자를 만났다.

세계문학전집이 아니라 ‘문학 총서’

‘제안들’이 무엇에 대한 제안인지를 묻는 첫 질문에 편집자는 “무엇에 대한 제안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확고히 말했다. 무언가를 해결하고자 제안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뒤이어 “일단, 문학총서 ‘제안들’은 세계문학전집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따라온다. ‘제안들’의 목록에 문학서를 비롯해 인문, 사상서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글을 다룬다’는 넓은 의미에서 ‘문학’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라고. “그리고 (세계문학) 전집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므로, 결국 ‘선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뒤 그녀는 “그럼 ‘총서’는 무엇이냐는 질문이 자연히 나올 텐데요.”하며 웃었다. “총서란 ‘일정한 형식과 체제로, 계속해서 출판되어 한 질을 이루는 책들’이라고 표준국어대사전은 정의하고 있는데…… 어쨌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전집이라는 단어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습니다.”

‘제안들’은 선집, 즉 ‘엄선된’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총서 목록의 순서도 수차례 바뀌었다. 서로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는 작품을 선별해나가는 중이라는데, 편집자는 총서가 완간되고 나면 어떠한 ‘지형도’가 그려질 것임을 예상한다. 관심 있는 작가들의 영역에 느슨히 걸쳐 있는 번역가들과 같이 조율해서 만들어나가는 작업이기에, 자연히 작가와 작가, 책과 책이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 “이 총서 전체가 하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한 권씩 순차적으로, 모두 읽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편집자는 단행본으로서도 충분히 빛을 받을 수 있는 작품들을 고르는 과정에서 권수에 한계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여타 세계문학전집 중에는 논문에 인용할 만한 ‘정본’들이 여럿 발표되고 있긴 하나, 너무 대량으로 출간되다보니 엄선했다는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한 권 한 권 승부를 볼 수 있는 책들이 자칫 총서라는 틀에 갇히지 않도록, 두 갈래 길을 다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30권을 조금 웃도는 선에서 총서를 ‘닫기로’ 했다.

“어떤 이들의 선택”이 될 수 있을 “어떤 이의 선택”

그렇다면 이 기획을 왜 시도하게 된 것인지, 경위가 궁금해졌다. 편집자는 다분히 개인적인 동기를 꺼내놓았다. “사실 이 기획의 시작은 ‘내 책장의 안쪽에 꽂아놓고 싶은 책들’이었어요. 책장을 언뜻 봤을 때 섣불리 공개되지 않았으면 하는 목록들이 있기 마련인데요. 빌려주기도 싫고, 혼자 아껴두고 싶은 책들. 그런 책들을 골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쉽게 발견할 수 없을 책들이라니, 고르는 과정이 상당히 어려웠을 듯 싶었다. “평소 책을 읽는 가운데 총서에 포함했으면 하는 작가가 있었고, 함께 작업하고픈 번역가에게 먼저 연락을 드려서 그분이 제안한 타이틀도 있었습니다. 현재 총서에는 이 구성이 절묘하게 섞여 있어요. 한편 이번에 새롭게 발굴한 번역가들은 평소 좋게 평가했던 번역서의 번역가나, 혹은 논문을 통해 발견한 분들이에요.” 편집자는 기존에 번역서를 낸 적이 없음에도 번역 작업을 탁월히 수행할 이를 찾기 위해 여러 논문을 찾아 읽었다. 한 작가에 관해 남다른 시각으로 연구하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그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가 독보적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논문만 읽고 결정하기에는 위험할 수 있어, 읽은 후에는 주변 번역가들에게도 의견을 구한 뒤 논의를 거쳐 선정하고 있다.

‘제안들’은 그래서 기획자이자 편집자인 한 사람의 취향과 선택이 총서를 아우르는, ‘어떤 이의 선택’이다. 그것이 어떠한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어떤 이들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다분히 개인적인 견해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어디서도 흔쾌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제안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놀랍게도 워크룸 프레스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선택을 지지해준 출판사에 손해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인 목표는, 재쇄를 찍는 것입니다.”


그런데 편집자는 “독자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싫다”고 말한다. “저희는 이 책을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것입니다. 읽을 사람은 읽을 것입니다. 안 읽을 사람은 안 읽을 것이고요. 즉 이 제안을 받아들일 사람은 받아들일 테지만, 안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이유가 있겠죠.” 그런데 이 말이 판매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네요, 라고 말하며 웃었지만 편집자의 표정은 진지했다.

공들인 번역, 그리고 꼼꼼한 편집

“저는 번역가들을 매우 존경합니다. 흔히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을 하는데, ‘제2의’라는 수식어를 떼고 싶을 정도예요.” 이 말을 할 만큼 편집자는 이번 총서의 제작 과정에서 번역에 공을 많이 들였다. 워크룸 프레스에 입사하기 전, 편집자는 오랫동안 잡지사에 다니며 글을 썼고 그 과정에서 문학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잡지사 이후에는 1년간 타 출판사에서 일했는데, 당시 유럽어권의 문학서를 맡으면서 해외 문학과 번역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고. 

“해외 문학의 경우 번역이 거의 90% 이상 책의 질을 좌우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뛰어난 편집과 디자인도 잘못된 번역을 뒤집기는 정말 어려워요.” 이와 관련된 경험을 편집자는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이미 출간된 책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재검토하는 상황을 겪은 것. 다른 번역가와 함께 다른 언어의 책을 구입해 다시 비교하게 되었고, 결국 개정판을 내야 했다. “번역의 질을 검토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자괴감에 시달렸어요. 그 일 이후 편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번역의 질을 높이는 것’이 됐어요.”

그래서 편집자는 번역가에게 더 좋은 단어, 더 적확한 표현에 대한 제안은 거침없이 하는 편이다. 불문학을 공부했기에 영어와 프랑스어 텍스트는 읽을 수 있어 해당 판본이 있다면 구해서 상당 부분을 반드시 읽어보려 하고 있다. “저 또한 글을 쓰고 번역을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하려 해요. 편집자로서 내가 맡은 역할은 교정 및 교열이다, 라고 생각하면 오직 그 한도 내에서만 바라보게 되는 듯합니다. ‘내가 역자라면 이렇게 접근하면 어떨까’, ‘내가 저자라면 어떨까’를 생각하고 번역가 분들에게 제안을 드리곤 해요.” 편집 과정에서 잡아내지 못한 오탈자는 어느 책에든 숨어 있을 수 있고, 일차적으로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번역의 질을 높이는 작업은 절대 드러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어 편집자는 직역과 의역이라는 단어 대신 ‘정교한 번역’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표현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정교한 번역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가 있습니다. 일단 작가에 대한 이해가 1순위입니다. 아무리 번역 실력이 기술적으로 출중하고 글을 잘 쓰시는 분이라고 해도,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데서 오역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는 일관성이에요. 번역 작업이란 한 권의 책 안에 담기는 것이기 때문에 관점과 톤, 문체가 일관적으로 흘러야 합니다.”

여기까지 듣다 보니 편집자가 책의 탄생 과정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하다”는 말이 돌아온다. “예컨대 영화감독은 자신이 디렉팅한 영화의 주역으로 주목을 받습니다. 그런데 편집자는 책이 출간되기까지 디렉터 역할을 수행함에도 오히려 가장 아랫사람으로 인식되는 듯합니다.” 편집자는 온갖 종류의 잡일을 해내는 존재로 인식되는 통념에 대해, 김씨는 충격을 받았다. 책 한 권을 완성하고 나서도 남의 일을 해준 것 같다는 인식이 출판계에 만연하다는 것이 씁쓸했다고.

“저는 열심히 편집했다는 이유로 ‘노고가 많다’는 칭찬을 듣고 싶진 않습니다. 일이야 누구나 각자 열심히 하는 거니까요. 편집자들 각자 멋진 작품을 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작품으로 승부하면, 편집자의 위상은 자연히 높아질 거라 생각해요.” 편집자의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실제로 편집자는 번역가와 디자이너들을 협업하는 동료로 인식하고 번역 및 편집 과정, 출간과 그 이후까지 진행 과정을 계속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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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뉘연 편집자는 “이제 시작이다”라는 말을 거듭했다. 30여 권의 문학 총서 ‘제안들’이 이제 첫 3권으로 서막을 연 셈이니, 끝까지 완성하는 것이 관건이다. 여기저기서 좋은 책들이 정말 많이 나오고 있으니, 단순히 발굴하는 것보다 “발굴하되 창조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이루고 싶다는 것이 편집자의 바람이다. “오직 한국어 판본만이 가질 수 있는 주요한 특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게끔 만들고 싶어요.”

다양한 판본을 만들어가면서 계속해서 편집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겠다는 편집자의 말에서 이 기획에 대한 애정과 포부가 동시에 느껴졌다. 편집자의 손에서 차례차례 풀어져 나올 나머지 ‘제안들’이, 미지의 책들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