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와 판타지. 두 단어를 보면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상 속 동물? 무너지는 고층건물 같은 재앙의 이미지? 여기에 두 장르에 관해 ‘할 말 많은’ 한 남자가 있으니, 바로 장르문학의 불모지인 한국에 당당히 'SF&판타지 도서관‘을 세운 전홍식 씨다. 그가 책에 대해, 도서관에 대해, 그리고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SF와 판타지 문학, 그 치명적인 매력에 대하여

가장 궁금했다. 사비를 잔뜩 들여 도서관을 직접 만들 만큼, SF와 판타지에 왜 그리도 빠져들었는지. 그는 “늘 받는 질문이라 저도 많이 생각해보는데요.”하며 여유 있게 운을 뗐다. “SF와 판타지는 둘 다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장르입니다. 인간 상상력의 산물인 동시에,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보고죠.” 전 씨는 SF와 판타지야말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낳을 수 있는 원천이라 생각한다. 물론 몰입이 쉬우며 굉장히 재미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자주 엮어 소개되곤 하지만, 두 장르는 차이점도 있다. “SF는 가능성의 문학, 판타지는 응원의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인즉슨, 우선 Science Fiction, 즉 ‘공상 과학’ 소설은 단어 그대로 과학적 상상력에 의해 그럴싸한 일의 가능성에 대해 보여준다. 사람들에게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로 이끈다. 반면 판타지는 '복고적‘이다.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J.R.R.톨킨은 판타지가 도피의 문학이라고 얘기했어요. 현실로부터 환상 세계로 도피한다는 거죠. 저는 그 말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판타지가 현실과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휴식을 취하게 하고, 치유와 응원을 해준다고 생각해요.” 현실을 잠시 잊게 하고,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주어 오히려 세계를 더 잘 보여주며 적응할 있게 도와준다. 판타지에 푹 빠져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왜 하필 도서관인가?

사당동 창고 공간에 최초의 자리를 얻어 개관한 것이 2009년 3월. ‘관장님’ 명칭을 얻은 지 어언 5년이 넘었다. 전 씨에게 “SF-판타지문학을 다른 방식으로도 알릴 수 있을 텐데 왜 하필 도서관을 택했는가?” 물었더니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제가 책을 워낙 좋아해서예요. 워낙 책을 많이 가지고 있다 보니 필연적으로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만들 수밖에 없었죠.” 집에 더 이상 책을 쌓아둘 수 없어 도서관을 만들었다니, 말로만 듣던 ‘독서광’을 마주한 듯하다. 실제로 현재 도서관이 보유한 10만 여 권의 장서 중 70% 이상을 전 씨가 가져다놨다. 집에는 여전히 2-3천 여 권이 더 있다.

전 씨가 구상한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읽고 대여하는 곳만은 아니다. SF-판타지문학 온라인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공간을 꾸릴 때부터(전 씨는 클럽장이었다) ‘문화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계획했다. 그래서 굉장히 좁은 공간임에도 다용도 회의실을 따로 만들었고, 재건축 때문에 운영이 어려워지자 홍대 근처로 자리를 옮기게 된 2011년 이후에도 회의실의 규모를 키워 갖춰 두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여러 가지 문화 행사를 하기도 했다는데, 전 씨는 지난 겨울 개최했던 ‘비블리오 배틀’을 소개했다.

“SNS나 블로그 등, 요즘은 책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비블리오 배틀은 평범한 독자가 자기 말로 어떤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지 직접 말해주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재밌다면 듣는 사람이 추천을 하는 식으로 ‘배틀’이 진행되지만, 상금은 없어요. 그런데 20명 신청을 받고 30명 정도 참석하겠거니 예상했던 그 행사에, 60명이 오더라고요. 정말 깜짝 놀랐고, 무척 즐거웠어요.” 전 씨는 이 행사가 도서관이 추구하는 방향임을 확인했다. 무조건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규모 큰 행사 말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가 진정으로 좋은 행사라는 것을.

도서관에서는 영화 상영회도 자주 개최되며, 게임 시연회나 대회도 열리지만, 여전히 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이유도 ‘사람’이었다. “문화 공간이라는 것이 단순히 문화만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통해 책을 만나자.’ 비블리오 배틀의 모토였어요. 사람을 통해 문화를 만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일까.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님부터 중고등학생까지, 굉장히 다양한 연령대의 회원들이 도서관을 찾아온다.


부실한 도서관 지원 체제, 대여점 문화의 만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SF와 판타지문학의 수용에 대해서도 할 말씀 없으시냐는 물음에, 전 씨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미국이나 일본은 SF전문도서관이 필요 없습니다. 문화가 굉장히 풍성하고, 공공도서관에 SF관이 따로 있죠. 규모가 큰 경우도 많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SF나 판타지 같은 장르의 위상이 매우 약하고, 그래서 들러리 취급을 받기 쉽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공공도서관에서 SF나 판타지 작품을 잘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보는 사람이 한정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단순한 오락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전 씨는 단호하다. “도서관만큼 장래에 남는 투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은 평생교육기관이에요.”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 도서관에 대한 재정 지원 자체가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지역 사회의 주민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을 지원하고 있으나, SF판타지 도서관은 ‘전문 도서관’으로, 장르 문화를 공유하는 곳이다. 자부심을 가지고 활동하기로 다짐했으나, 정부 지원은 없다. 올 초에도 재정 문제로 도서관 문을 닫을 뻔했다.

제일 많이 팔린 책 1위가 학습지, 2위가 실용서, 그 중에서도 자기 계발서인 우리나라에서 독서 문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전 씨는 말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의 수는 현재 도서관이라 부르기 부끄러운 규모까지 포함해 1천 개가 채 되지 않는다. 일본의 도서관 수는 5만 개가 넘는다. 인구는 3배 차이, 도서관 수는 무려 50배 차이다. 

“이런 도서관의 현실에 반해, 대여점은 엄청나게 성행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입니다.” 대여점에 자주 가는 사람들은 책을 사지 않지만, 도서관에 자주 가는 사람들은 책을 산다는 통계가 있다고 한다. 전 씨는 그것이 좋은 책을 접하고, 벗할 수 있는 사람들과, 단순히 시간 때우기로 책을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라고 본다. “문화적 다양성이 굉장히 부족한 겁니다. 모든 책이 도매급으로 여겨지는 대여점은 문화를 잠식하는 시스템입니다.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씨는 “내게 공간만 있다면 책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당동에 재건축이 시작되면서 도서관을 사실상 닫아야 할 상황에 놓여있을 때 기적처럼 황금가지(민음사 계열 SF판타지문학 출판사)에서 후원 연락이 왔듯, 조금씩 개인 후원자가 늘어나고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듯, 언제까지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라는 다짐을 하는 그다. 

게임 시나리오 기획자를 거쳐 SF판타지문학 도서관장, 현재는 SF관련 강의를 통해 문화를 알리는 10년차 교수인 그는 40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소년 같은 얼굴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에는 남김없이 애정을 쏟는 천진난만한 태도와 더불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끝내 실현하는 결연함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도 없었을 것이다. 공간은 확보되어 있으니, SF판타지 문화의 허브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품는 전홍식 씨. 그의 마지막 말에 여운이 짙다.

“문화가 돈을 벌기 위해서만, 무언가 ‘남는 게 있어서’ 존재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향기를 어떻게 향수로 만들어 돈을 벌까만 생각하기보다, 향기를 자연스럽게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오랜 인류 문명의 향기, 책의 향기,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함으로써 풍성한 행복함을 느낄 때의 만족감이 주는 향기. 저는 고리타분한 사람이라 그런지, 책이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