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영화의 내용 및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별 거 아닌 사진을 보고도 야릇한 상상을 할 때, “음란마귀가 쓰였어!”라고 표현한다. 노래에 집중하느라 눈과 입가가 풀린 아리따운 가수의 표정 등 객관적, 중립적 사건을 ’음란 렌즈’를 장착한 체 보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렌즈’를 끼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주체임을 보여준다.

6.4 지방선거를 앞둔 즈음이다. 국민적 선택을 앞둔 시점에 개봉하는 엑스맨 시리즈의 주제가 ‘선택’이란다. 여기서 ‘렌즈’가 발동하기 시작한다. 평일 저녁 시간 영화표 가격의 압박에 3D 안경을 끼고 영화를 체험하는 호사는 누리지 못했다. 3D 안경으로 화려한 액션을 보다 생생하게 수용하는 대신 셀프로 렌즈를 장착하기로 했다. 해서, ‘6.4 지방선거 렌즈’를 끼고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쳐 패스트’를 관람해보았다. 관람을 넘어 본격 해석에 나서보기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번 선거에서 그래야 하는 것처럼.

<엑스맨>을 통해 본 정치인들

영화는 2023년, 암울한 미래에서 시작한다. 세월이 흘러 그토록 각을 세우던 프로페서X와 매그니토는 진정으로 의기투합한다. 그러나 역대 최강의 엑스맨 살인병기인 센티널을 이길 수가 없다. 결국 시간여행으로 울버린을 1973년으로 보내 센티널이 발명되는 걸 막기로 한다. 울버린에게 주어진 임무는 미스틱의 선택을 바꾸는 것. 과거에 과학자 트라스크를 죽이려다 체포된 미스틱의 DNA가 센티널 완성에 결정적 공을 했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간 울버린은 미스틱의 선택을 바꾸려 하나 만만치 않다. 그녀는 끝내 폭주하다 육탄혈전 속에서 자신의 DNA를 남겨 센티널 연구에 쓰이게 한다. 울버린에 동조하는 척 하던 매그니토 역시 마이웨이를 가더니 카메라로 생중계되는 앞에서 인간들을 지배할 것이라고 공포해 전 세계를 적으로 만든다. 역시, 변화를 만드는 건 힘들다. 아니, 어떤 선택을 하던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프로페서X, 울버린, 매그니토, 미스틱 등 엑스맨의 군상 속에서 우리 정치의 기시감을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신망 받는 기업인의 지위를 버리고 정치에 뛰어든 안철수 의원. 그는 분열적 지역주의, 정파주의를 지양한 '새정치'를 꿈꾸었다. 그러나 공천 갈등 속에서 한계를 드러낸 후 그의 행보는 민심도 호남의 지지기반도 얻지 못한 채 길을 잃었다.

영화 속 매그니토는 프로페서X의 멱살을 잡고 고함친다. “네가 인간과의 화합을 말하는 동안 어땠어? 수많은 돌연변이들이 죽어나갔다고! 너는 그 동안 뭘 했어?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던 게 다잖아!” 포털 사이트 댓글 창에서 정확히 같은 논리로 흐르는 안 의원에 대한 비판을 본다. ‘간철수’라는 웃지 못 할 별명은 그가 추구하는 새 정치는 어디에도 없다고 조소하는 듯하다. 선한 인상으로 인기를 끌던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는 18대 대선과 통진당 사태에서 과격한 사상을 커밍아웃해 국민의 안중에서 아웃되었다. 우리가 선택한 정치인들은 점진적 개혁이든, 도발적 혁명이든, 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진이 빠진다.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진다. 영화 속 과거의 프로페서X가 그랬다. 그는 한때 인간과 돌연변이가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을 실현하지 못하고 아끼던 동생, 절친한 친구, 자신의 능력,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는 자신의 능력을 재앙처럼 여기고 포기한다. 생각을 읽고 변화를 시도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화 속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건 근 10년 간 우리도 같은 좌절을 겪고, 같은 무관심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민주당의 손학규 의원이 내세웠던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를 이번 선거에 새정치연합이 그대로 들고 나왔다. 지난 세월 간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6.4 지방선거 때 ‘반드시 투표하겠다.’고 답한 유권자가 절반이 조금 넘는 것(55.8%, 선거관리위원회)이 사람들의 의욕 상실을 보여준다.

선택에 따른 개선이 없으니 정치적 무관심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다. 허나 영화 속 프로페서X는 히어로답게 다시금 의기를 충전해 미스틱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한다. 결국 미스틱은 자신의 선택을 바꾸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이번 시리즈의 메가폰을 잡은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작은 물결이 모여 강물의 흐름이 바뀌니,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고 엔딩에서 단언한다. 유대인, 게이라는 소수자의 굴레를 지고도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개인사로 증명한 삶의 진리일까. 아니면 히어로 물이라는 장르 특성 상, 사회성 강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낙관적 결말을 그려야 한다는 상업적 강박일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변화를 시도했으나 바위 앞에 깨지는 계란이 되고 마는 경우를 왕왕 본다. 서울대, MBC 아나운서 출신이라는 고 스펙, 준수한 외모, 유려한 말발로 진보 정치의 미래로 여겨지던 유시민 전 장관은 참여 정부의 실패, 통진당 분열의 진통을 겪은 후 정계를 은퇴하지 않았는가. 그는 여전히 시민운동으로 정치적 꿈을 이어가고 있으나 제도권 정치 내에 그가 설 자리는 정녕 없었던 걸까 아쉬움이 든다. 현실엔 아쉬움이 많다.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통쾌하지 않다.

 

 

어쩌면 고작 영화 한 편으로 우리의 현실에 적용할 만한, 진기한 깨달음을 발견하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유치한 소망일지도 모른다. ‘6.4 지방선거 렌즈’를 장착한다는 것 자체가 할리우드의 ‘소망의 세계’를 냉혹한 ‘현실 세계’로 옮겨보고 싶어 하는 무리한 시도일 수 있다. 해석을 굳이 끌어들이기보다 화려한 액션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영화의 해석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곧이곧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게 여러 모로 편한 태도이긴 하다. 사회와도, 자신의 내면과도 갈등을 겪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지배적 정서 역시 ‘곧이곧대로’에 쏠려있다. ‘까라면 까라.’는 냉전 시대의 군사 논리 겸 80년대 산업 성장의 모토에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21세기 자기계발서의 주문까지.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적, 합리적 방식인가? 변화를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것의 결과가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가만히 있으라.’는 선장의 말 이전, 선박회사와 정계의 유착을 가만히 놔둔 결과 우리는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해야 하지 않았는가.

영화가 현실의 깨달음까진 아니더라도 약간의 동기로서 작용할 순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개혁이든, 혁명이든 선택을 내리는 ‘행동’을 한 것이다. 우리 역시도 선택할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고 비관적 결과를 맞았더라도, 여전히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운명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과거의 프로페서X와 매그니토는 자신들이 미래에 손잡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나타난 울버린은 두 사람의 합작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박원순 후보를 뽑든, 정몽준 후보를 뽑든 국민의 의지가 있단 걸 보여준다면 양자가 의기투합해 서민을 위하는 정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싱어의 말처럼 “정해진 것은 없다.” 어떤 선택이든 성실히 해나가다 보면, 그러다 보면 “작은 물결이 모여 강물의 흐름이 바뀌는 결과”를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쳐 패스트’를 보고 6.4. 지방선거에 투표하러 갈 의지를 되찾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