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스포주의)
흔히 청소년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고 한다. 부모와 집,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영화 <거인>의 주인공 영재처럼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도 있다.
영재는 부모의 무책임에서 벗어나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 함께 모여 사는 그룹홈에 스스로 들어간 아이다. 하지만 그룹홈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다. 눈칫밥을 먹어야 하고 생존하기 위해 자신을 꾸며내야 한다. 신부라는 꿈도 영재의 것이 아니다. 그룹홈의 원장 부모에게 잘 보여서 그 곳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영재는 철저하게 생존을 위해 행동한다. 신부가 되겠다며 누구보다 착한 척 연기하지만 반대로 돈을 벌기 위해 후원물품을 훔쳐 판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같은 방 친구인 범태의 곤란을 모른척하고 짐이 되려는 동생과 가족을 향해 악을 쓰기도 한다.
ⓒ영화 <거인>스틸컷
위선과 위악 사이에서 거인이 되어버린 소년
영재는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스스로를 부풀린다. 스스로를 부풀리는 방법은 위선과 위악 두 가지 방법이다. 성적도 되지 않고 스스로도 원하지 않지만 이삭의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신부를 꿈꾸는 착한 소년을 연기한다. 원장 어머니와 신부님에게 영재는 은혜를 아는 아이, 기특한 아이이다.
하지만 영재는 은혜를 아는 아이도 기특한 아이도 아니다. 후원물품을 몰래 훔쳐다 팔며 생계를 유지하고 자신의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 범태를 모른척한다. 오직 자신을 위해서이다. 범태의 시각에서 영재는 ‘친구도 아닌 영악한 놈’일 뿐이다.
관객들은 영재가 도의적으로 부적절한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영재를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착한 척, 도둑질, 같은 방 친구를 기만하는 일 모두 영재 본인의 것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존재하는 보호와 따뜻한 집, 부모라는 그늘이 영재에게는 없다. 그런 영재의 처지를 목격한 관객들은 영재를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소년에게 닿지 않는 말뿐인 위로들
시종일관 영재를 불쌍하게 여기고 보듬어 주고 싶은 사람들은 관객뿐이다. 영재가 힘들다고 외칠수록 영화 속의 어른들은 영재에게 더 냉정하게 군다. 영재 안의 아픔을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를 하며 말뿐인 위로를 건넨다. 영재 주변의 어른들은 "누구나 학창시절에 그만한 아픔쯤은 있다", "세상에는 너보다 불쌍한 사람이 많다"는 말로 영재가 지닌 삶의 무게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말뿐인 위로들이 영재를 품어줄 수는 없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영재에게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다'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절망을 실감시켜 줄 뿐이다. 안쓰러운 동생조차 밀어내고 이용해야만 하는 영재에게 타인의 평범한 이야기들은 사치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운 것은 그룹홈 부모의 눈칫밥도 진짜 부모의 무책임도 아니다. 영재를 더 숨 막히게 만들었던 것은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영재의 아픔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고 오히려 영재를 다그치고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그 속에서 영재는 뼈저리게 혼자라는 것을 실감했고 살아남기 위해 거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 <거인> 포스터
성장이 아닌 생존
영화 말미에 영재는 또 다른 그룹홈으로 옮겨간다. 영재는 떠나기 전에 동생 민재에게 쓰던 물건을 주며 씁쓸하게 웃어 보인다. 영재의 눈물 맺힌 웃음처럼 영재의 새 출발이 어딘가 서글프다. 새 출발 속에서 중요한 것은 영재의 성장 여부가 아니다.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봤던 영재의 살아남기가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듯 한 느낌을 받게 된다.
<거인>은 성장영화가 아니라 생존영화이다. 영재는 의지할 곳 없이 자신 하나만이라도 감당하기 위해 빌고 자존심까지 버렸다. 그런데도 영재의 고통이 단순히 성장통으로 치부될 수 있을까. 단순한 성장영화였다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식의 영화 속 어른들의 조언에 실소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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