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보이는 것이 진실을 압도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가면 뒤의 옹졸하고도 흉측한 얼굴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속 사람들은 빛나는 것에 열광한다.
그들은 아름답고 처연한 빛깔 고움에 현혹돼 사람이 아닌 가면에게 동정과 사랑을 담아 보낸다-

 

ⓒ <나를 찾아줘> 포스터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닉과 에이미는 모든 이들이 부러워하는 이상적인 부부다. 결혼 5주년째 되던 아침 그녀가 사라지며 문제가 발생한다. 에이미는 그녀의 어린 시절을 모티브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동화 ‘어메이징 에이미’의 실제 주인공이었기에 일의 파장은 더욱 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녀 뒤로 어설피 남겨진 단서들은 증거로 변해 닉을 살해자로 지목한다.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미디어 그 자체


사람들은 한 남자가 절박하게 외치는 투박한 진술엔 관심 없다. 그들이 보고자 하는 건 자극적이고 실감나는 스토리텔링이다. 이들의 욕망을 잘 아는 미디어는 기꺼이 그러한 생리(生理)를 충실하게 이용하는 증폭제다. 미디어가 매끈하게 가공한 현실은 사람들에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눈요깃거리이자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결국 중요한건 눈앞에 존재하는 일이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다. 영화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아주 가까운 현실의 이야기다. 우리의 세상에서 미디어는 상위 0.05%와 0.01%의 학생들을 비교하고,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러한 수치적인 능력을 부각시키는 자막을 띄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수치와 행동이 실제로 관련이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극적인 조명방식은 결코 미디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보여주는 것만이 내가 되는 현실 전체의 문제다.


영화 속 사람들에게는 남의 일에 대해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쳐 평가하고 판단할 시간도 의지도 없다. 고정관념을 통해 사안을 재단하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곧 다수에 의해 형성된 ‘그럴듯한 것’이 진실의 탈을 덮어쓰고 진실을 밀어낸다. 주인공들은 모두 이러한 원리를 잘 인지하고 능숙하게 써먹는 데 특출난 인물들이다. 그들 입장에서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타파의 대상이 아닌 좋은 도구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 “카메라 어디 있죠? 찍고 있나요?”를 묻고는 의도적인 행동을 하는 몇몇의 특수 직업인들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역시 스스로를 극적으로 비춰내는 능력을 개발해야 하는 1인 미디어다. 일례로 사회적 소통을 활성화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등장한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조차 내가 얼마나 소셜(Social)한가를 보여주기 위해 어필하는 하나의 장치로 남았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닉은 자신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에이미를 혐오하며 그녀의 실종 때는 해방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진실과는 다르게 외부인들과의 만남에서는 에이미의 실종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고 수천만이 보는 방송 카메라에 눈을 맞추고 에이미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을 고백한다. 에이미의 부모는 그녀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전광판, 방송, 광고에 표현한다. 그들은 에이미를 찾으려는 절박함의 감정과 그녀를 예쁘게 포장한 ‘어메이징 에이미’를 부각시킨다. 영화의 핵심인 에이미는 이들 중에서도 ‘보여지는 것’의 중요성을 삶 전반에서 뼛속깊이 체득하고 매우 능숙하게 써먹는 인물이다. 그녀는 최후까지도 이 모든 구조의 꼭대기에 선 승자였다. 닉은 그녀의 자존심을 뭉그러트린 죄의 대가로 그녀가 놓은 덫에 속절없이 당하며 파렴치범으로 대중들에게 재판받았다. 결국 전파를 통해 퍼져나간 사랑고백에 넘어간 에이미의 용서로 가까스로 살해자 명찰은 뗄 수 있었지만 말이다.


영화는 보기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을 근본부터 부정하게 한다. 평온하고 따뜻한 미소와 제스처 뒤에 놓인 그들의 서로에 대한 혐오감, 통제와 탈피의 욕구를 알게 된 후 관객은 찝찝함과 불쾌감을 안은 채 퇴장하게 된다.


“아내의 두개골을 부수고 뇌를 꺼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다”
그의 온화한 목소리와 행동에 대비되는 파괴적인 감정이 배어든 말은 시작과 끝에서 보드랍게 우리에게 스며든다.


영화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영화 속 이야기가 피부에 닿는 사회로 이어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내 지인들이 어떤 능력을 지닌 사람인지,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은 얼마나 좋은 것들인지, 내가 아는 건 얼마나 많은지를 드러내야 한다. 수치적으로 환산할 수 있다면 더 좋다. 과학적으로 보이기에 훨씬 ‘사실스럽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려도 그것은 합리적이기에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엔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눈에 보이는 것들로 치장하는데 급급해져버리곤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려는 순간 사회적인 배제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비로소 사람답게 존재할 수 있다는 ‘인간(人間)’이란 의미는 족쇄로 남는다. 결국 우리는 진짜 ‘내’가 무엇인지에 대한 갈망을 새까맣게 잊거나, 혹은 처절하게 느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