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셔요.

2년 쯤 전이다. 남자친구와 평소처럼 카페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여느 커플처럼 가상의 미래를 그리기도 하고 실없는 질문을 주고받기도 하다가 내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우리 아이 낳으면 이름은 어떻게 지을까?"

남자친구는 1초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되물었다.

“누구 성을 따를 건데?”

나름 남녀평등에 대한 이상이 확고하여 데이트 비용도 더치페이가 좋고, 가방 들어주는 것도 달갑지 않은 나지만 이 대답은 너무 충격적이라 마치 아침을 먹었냐고 물었는데, yes or no라는 예상 답변이 아니라, 먹고 토했다는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남자친구가 자신의 성으로만 미래의 아이의 이름을 짓기에, 왜 내 성은 생각지 않냐고 물었다가 “이래서 우리 엄마가 똑똑한 여자 만나지 말랬는데..”라는 날벼락을 맞았다는 고함20의 이모 기자의 경험을 들어봐도 자식에게 여성의 성을 붙일 권리는 여전히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인 듯하다. 이성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부모의 성을 같이 사용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기까지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게 되면 그냥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꼴페미'소리를 듣게 될 것이 자명하다. 그래서 소극적인 성격을 가진 나의 무의식은 이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고민해 본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남자친구에게 고맙게도)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아이가 나의 성을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것 같다. 아직 여성의 성을 쓰는 것이 어려운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자주 접할 수 있는 부모의 성 같이 쓰기가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져 흐뭇한 마음으로 이름을 고민해 보았다.

그런데 곧바로 크나큰 난관에 부딪혔다. 시아버지/시어머니나 주변의 시선보다도 더 큰, 그 이전의 벽이었다. 내 성은 바로 ‘구’였던 것이다. 원래도 ‘구 씨’라는 내 성씨에 예쁜 이름을 붙이기가 힘들다고 생각하던 터였지만, 남자친구의 성씨긴 ‘석 씨’와 결합하자 더욱 가관이었다. ‘석구○○’ ‘구석○○’이라니... 장미같은 어여쁜 이름도 ‘구석장미’가 되어버린다니...

실망한 기분을 끌어 올려, 주요 10대 성씨들과 ‘구 씨’의 조합을 만들어 보았다.


엄마 ㅠㅠ 나 삐뚤어 질꺼야 ㅠㅠ

10대 성씨는 그나마 얌전한 편이다. 피구(피구왕 통키라도 만들셈인가?), 구피(디즈니에 감명받은듯하다.), 방구, 구방, 천구, 구천, 마구, 구마(구마적은 이렇게 탄생했나?), 지구, 구지, 공구, 구공, 축구(박지성이라도 키워볼까?), 구축 처럼 웃긴 성씨는 끝이 없으며 '독고'씨와 같은 두자 성과 결합한 구독고, 독고구, 구황보, 황보구, 구남궁, 남궁구 등등. 구씨를 붙인 성씨의 세계는 평범하지 않다.

누군가가 이상한 이름을 가진다고 해도 자식에게 부모의 성을 여러번 붙여 주어 이러한 이름에 무뎌졌다면, 조금 더 쉽게 생각할 수 있을텐데. 혹은 이런 것을 무시하고서라도 내 아이의 이름을 네자로 붙여준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텐데. 나의 결정이 나에게가 아닌 아이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니 그도 쉽지 않다.

미래에 만약 내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조합의 성씨들을 이겨내지 못했을 때, 누군가 여성으로써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가장 어렵게 했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난 이렇게 답하련다.

“제가 구씨로 태어난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