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씨*는 교사의 길을 가기 위해 사범대 졸업 후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다. 쉽게 속마음을 터놓지 않으며 방어적인 성격이다. ‘어렵고 괴로운 것은 피해가자’는 생각이 강하다. 그런 그에게도 세월호 사건은 피해갈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는 때때로 세월호 사건을 예고 없이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당시 교생실습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아침은 늘 출근 준비로 바빴다. 핸드폰을 하고 있다가 포털 기사로 확인했다. 하지만 제대로 인식하지는 못했다. 아침 시간 기사들은 오보도 있었고 정확한 정보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원 구조’라는 말 때문에 일종의 해프닝인 줄 알았다. 하지만 퇴근 후에는 사건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확실한 정황을 알게 된 것도 퇴근 후였다.

 

재난 보도를 챙겨보지는 않는다. 방어적이고 괴로운 것을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에 재난 보도가 힘겹다. 재난이 일어나면 재난 보도가 이어지는데 재난보도의 내용이 더 재난 같다. 얼마나 살았고, 얼마나 피해를 입었고, 얼마나 죽었는지. 오열하는 유가족의 모습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계속 우울해지고 겁이 난다. 괴롭다. 그래서 더더욱 사건, 사고, 재난 보도를 일부러 안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당시에도 뉴스를 잘 안 봤다.

 

그렇다고 세월호 사건 소식을 모두 차단하지 않았고 차단할 수도 없었다. 다만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오프라인, 온라인에서 모두 세월호 이야기뿐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황당한 오보와 의문투성이의 사건이었고 모두에게 트라우마인 사건이었으니까.

 

세월호 사건은 교통사고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1월 1일이었다. 경미한 부상이었지만 운전을 하고 계시던 아버지는 많이 다치셨다. 10년도 더 된 사고지만 지금도 아버지는 새해 첫날 운전을 하지 않으신다.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조차 과거의 사고를 떠올리게 하는데 유가족 분들이 갖는 트라우마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세월호 사건은 과거 트라우마의 회상뿐 아니라 현실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교생실습 중인 상황인 이유도 있었다. 담당 반이 당시 사고를 당한 학생들이랑 동갑이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학생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같은 연령의 학생들이 그런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자꾸 학교에서 학생들을 볼 때마다 사고를 당한 학생들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잊을 수가 없었다.

 

2014년 8월 26일 서울광화문광장 ⓒ이우기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사건 다음 날, 교생 나가던 학교에서 아침기도 담당이었다. 아침 기도 주제가 ‘학생들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상황이 맞물리는 주제였다. 다른 곳에 있는 아이들은 안전하지 못했고 큰 사건으로 인해 사건의 피해자 뿐 아니라 학교에 있는 아이들조차 행복하지 못했다. 아침 기도를 진행하던 중 울음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힘들었다.

 

학생들은 일종의 공포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수학여행이 예정되어 있었던 데다가 아직은 ‘죽음’을 멀게 생각할 나이에 또래의 죽음이 주는 공포는 상당했다. ‘무섭다’는 반응이 많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들 사이에서 근거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당시 희생자들이 탔던 세월호가 사실은 본인들이 탈 배였다는 소문이었다.

 

교사 분들도 힘들어했다. 교사 분들은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인 분들이 태반이었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일상인 현장에 게시는 분들이다. 게다가 학생들을 구하다가 돌아가신 선생님도 있었고, 교감 선생님의 자살사건도 있었다. 나보다 더 슬퍼하셨을 것이다. 슬퍼할 새도 없이 긴급하게 예정된 수학여행에 대한 회의까지 하셨다.

 

학생들을 구하다가 돌아가신 선생님의 소식, 교감 선생님의 자살 사건을 보며 나 또한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창하게 말하면 교사관의 변화였다. 사건 전에는 막연하게 학생들에게 친근한 교사가 되고 싶었다. 아이들과 관계가 원만하고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교사가 목표였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 당시 돌아가신 분들, 그리고 아이들을 구하지 못해 죄책감에 시달리고 비난을 받는 분들을 보면서 교사에 대한 나의 생각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교사의 ‘사명감’이라는 것에 대해.

 

2015년 3월 17일 안산단원고등학교 ⓒ최윤아 / 게재 :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물론 교사가 어느 정도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는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가 해야 할 일이 맞고 당연하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 상황이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위기 속에서 과연 아이들을 구하고자 하는 사명감이 살고자하는 본능을 누를 수 있었을까. 아이들을 구하다 돌아가신 분들이 분명 대단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쉽게 비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가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 있어서 걱정이 더 많아졌다. 교사의 사명감, 인간으로서의 교사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긍정적인 일이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매일 상상한다. 작게는 버스에서 아이들이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나부터 크게는 정말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생활의 나’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항상 ‘내게는 일어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변했다. 안전에 민감해졌고 수많은 위험이 무서워졌다. 피부로 느낀 일이 있었다. 예전에는 경보기가 울려도 잘못 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뿐 아니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건 이후, 얼마 전 아파트에서 화재 경보가 울렸는데, 경보 소리를 듣고 뛰쳐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오작동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텐데. 나가보니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펼쳐진 광경이 예전과 너무 달랐다는 소리다. 아파트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경보를 믿게 된 것과 반대로 불신도 강해졌다.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할까. 나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 자체가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규칙을 지키고 믿었던 사람은 희생당하는 걸 모두가 눈으로 확인한 거나 다름없다. 경보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나처럼, 세월호 사건은 모두에게 트라우마를 가져왔다.

 

지난 1년 동안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일상 속에서 매번 세월호 사건 당시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이다. 때때로 예고 없이 생각하고 상상하게 된다. 예고 없는 생각에 여전히 울컥한다. 작은 불씨나 마찬가지다. 불이 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사그라 들었을 뿐이다. 세월호 사건 관련 소식을 접할 때마다 생각과 슬픔은 다시 거세진다.

 


*[뭍위에서] 기획에서 인터뷰이의 이름은 인터뷰이의 의향에 따라 실명 혹은 익명으로 기록했다.

**인터뷰는 2015년 3월 20일 진행됐다.

인터뷰.글/ 백야(yjeu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