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쌤 다이어리는 지난주부터 3주에 걸쳐 중고등학교 영어교과서에서 찾을 수 있는 영어교육의 문제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어교과서의 영문법 소홀 문제에 이어, 이번 주에는 Activity 위주로 짜인 교과서의 비효율성에 대해 이야기 할게요.


Listen and repeat!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요즘 중고등학교 특히 중학교 영어시간에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은 ‘to부정사의 부사적 용법’ 따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Listen and repeat!’라는 힘찬 소리가 훨씬 더 자주 교실 창문 바깥으로 흘러나오지요. 왜 그렇냐고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교과서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현재 중,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서 본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단원 당 3분의 1 정도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테이프가 들려주는 무언가를 듣고 간단한 문제들을 풀 수 있도록 만든 부분들이 대다수입니다. 본문 뒷부분에도 뭔가 빈칸을 많이 만들어 놓고 채우라고 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고치거나, 문장을 새롭게 써 보거나, 알맞은 것끼리 연결하거나 이런 문제들이 교과서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새 교육과정에서 추가된 Activity Book은 아예 책 전체가 이러한 구성으로만 만들어 졌지요.



(이미지 출처 : http://cafe.naver.com/joonggonara/2343668)


문제를 눈앞에 둔 아이들의 다양한 반응

물론 이렇게 생활 영어 교육에 가깝도록 바뀌어 가고 있는 교과서의 변화 자체는 바람직한 방향임에 틀림 없지요. 하지만 이러한 책의 구성이 학생들의 학습 효과를 제대로 높여주고 있는가 하면 저는 자신 있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겁니다. 바로 교사 한 명이 적게는 30명, 많게는 40명을 가르치도록 만든 체제 속에서는 이러한 문제 풀이 학습이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사교육 체제 속에서 영어 실력이 정말로 천차만별인 아이들을 한 교실에 묶어 놓고 테이프를 틀어놓는 것은 전파 낭비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어렸을 때부터 이미 영어에 귀가 열린 아이들은 교과서가 너무 쉽습니다. 테이프에서 나오는 소리는 굳이 집중을 격하게 하지 않아도 적당한 센스로 답을 찍어낼 수 있지요. 빈 칸 채워 넣기 같은 건 왜 이런 걸 하고 있어야 되는지 이해를 못하기도 하지요. 너무 당연하고, 쉬운 문제를 자꾸 풀라고 하니까 말이죠. 그래도 이런 아이들은 남는 시간에 공상이라도 하면서 상상력, 창의력이라도 키운다고 생각하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영어에 자신이 없는 아이들일 겁니다. 교과서 진도를 나가야 하는 학교의 현실상, 테이프는 많아야 같은 부분을 두 번 들려주는 게 전부인데요. 어차피 들으려고 노력해봐야 제대로 들리지도 않고, 답을 대충 찍어버리는 게 가장 편한 방법입니다. 대충 펜을 굴리고 나면 이미 푼 다른 아이들과 쪽지라도 주고받을 수 있는 동등함이 생기니까요. 본래 영어 듣기라는 것이 혼자 여러 번 듣고, 속도도 조절해서 들어 보고, 입으로도 여러 번 말해 보면서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인데요. 두 번의 테이프 재생을 듣는 것만으로는 실력이 발전할 리도 없죠. 악재가 겹치면서 이러한 상태는 유지되고 축적되어, 학년이 올라갈수록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문장을 쓰는 것이나 빈 칸을 채워 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장 쓰는 건 평균 수준의 아이들에게 맞춰 설명을 해 줘봐야 기본이 없으면 이해가 안 되고, 빈 칸 채워 넣기는 왜 이 곳에 그 단어가 들어가는지에 대한 센스가 없기 때문에, 교과서 본문을 뒤져서 같은 문장을 찾아 베껴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blog.naver.com/pati35/30043720350)


지금은 공교육이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영어 수업시간에 다른 그룹의 두 아이들은 (사실 이렇게 두 그룹으로 묶기에도 아이들의 실력이 너무 다양하지만) 다른 이유로 하품을 하게 됩니다. 결국 사교육을 비롯한 공교육 이전의 학습이 갈라놓은 영어 실력이 공교육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게 되는 것이죠. 결국 상위권이든, 하위권이든 자신과 맞지 않는 수준의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을 통해 영어 실력을 쌓으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준별 분반을 하면 된다고요? 물론 조금은 나아지겠죠.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가 학원에서 가르쳤던 아이들 중에 정원이 6명인 클래스가 있었는데요. 이렇게 적은 수로 수업을 해도 아이들 간에 작은 실력 차이만 있어도 Listening의 경우 그 수업이 더욱 힘들어집니다. 한 아이가 아직 못 풀었으면 테이프를 다시 돌려줘야 하고, 이런 경우에는 이미 문제를 해결한 다른 아이들이 분위기를 흐리게 되죠. Listening, 나아가서 언어 전반을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공부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죠. 토익 스터디를 할 때 기존 토익 성적을 기준으로 스터디 구성원을 선발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위권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소위 암기과목이라고 여겨지는 사회, 과학 등은 책을 읽어가면서 외우기라도 하면 됩니다. 하지만, 영어는 책 속에는 방법이 없다는 거죠. 아예 책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자습서를 동원해보지만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습니다. 아이들도 참 답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시험 때면 영어 시험공부는 영어 공부가 아니라 영어 본문 외우기 따위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이미지 출처 : http://blog.naver.com/areas/100005064099)


이상을 현실로 만들 방법 고안해야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완벽한 혜안이 저에게 있느냐 하면 사실 그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물론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있죠. 형식적으로 영어 교육을 강조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영어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학생들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켜주기 위해 영어 교육을 하는 거라면 개개인이 수준별로 수강신청을 해서 자기 수준에 맞는 강의를 들을 수 있어야 하겠죠. 그리고 Listening을 비롯한 각 영역을 공부할 때 개개인별로 교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영어 사교육이 좀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결단과 많은 비용과 많은 교사가 필요한 일입니다.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이라는 이야기죠. 하지만 어쨌든 현실이 단점이 있다면 타협만 할 것이 아니라 이상으로 한 뼘이라도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비용 같은 문제는 현재 영어 사교육 시장 반절의 크기만으로도 해결 가능할 것 같은데요. 이상을 현실로 만들 방법을 교육 관료들이 고민해 주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