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하면 막연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SUN처럼 큰 키에 마른 몸,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에 흰 피부를 가진 남자. 비밀을 갖고 있는 듯 슬픈 눈을 가진 이런 남자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과 같은 남자라면. 거부감보다는 다른 남자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처럼 게이하면 늘상 드라마나 영화 속 미소년의 이미지만 떠올렸던 나. 영화 <종로의 기적>을 통해 게이에 대한 환상, 제대로 깼다. 영화 속 진짜 게이들은 미소년도 아니었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남자들도 아니었다. 게다가 사회에서 차별 받아 슬프고 힘든 삶을 살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들의 삶은 유쾌하고 즐거웠다. 영화 <종로의 기적>에 꽃미남 게이는 없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과 같은 남자일 뿐인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영화는 진짜 게이 네 명의 삶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고 있다. 영화 감독 준문, 인권 운동가 병권, 스파게티집 사장 영수,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욜. 네 명의 진짜 게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 소수자들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벽장에서 나와 세상을 향해 소리치다

 
감독님, 감독님~ 이 소리가 게이야! 이 게이야! 라고 들릴 정도에요


영화 감독 준문은 배우, 스텝들과 생기는 거리감 때문에 괴롭다. 게이라는 이유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나는 게이가 아니기 때문에 모른다, 그러니 게이인 네가 다 알려주고 책임져야한다는 입장의 배우와 스텝들. 영화는 배우와 스텝이 함께 만드는 것인데, 준문의 영화는 동성애가 주제라는 이유로 준문 한 사람만의 영화가 돼버린다. 동성애 영화를 만드는 스텝과 배우들은 실제 나는 동성애자가 아님을 드러내기 급급하고준문은 촬영 내내 소외감을 느끼면서 결국 영화 촬영을 중단한다.

준문은 사실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이 사회로부터. 물론 사회가 게이들에게 관대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낙인찍고 그들을 배척하는 상황에서 게이들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찍은 그 낙인을 인정 하고 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동성애자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수 없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도 없게 돼버린다. 게이들이 나는 게이니까 아무것도 못해라는 이유로 사회가 찍은 낙인을 인정할 때,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더 멀어지게 된다. 준문은 영화 촬영을 중단하고 시간을 가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은 일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사람들이 고의로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준문 역시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담을 쌓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준문은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면서, 촬영에 앞서 배우와 스텝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고, 그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배우와 스텝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스스럼없이 행동하고 동성애자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이전에 없던 자신감을 보였다. 예전과는 다른 당당한 모습 앞에서, 스텝과 배우들은 준문을 게이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고 있었다.


우리가
24시간 섹스만 하는 건 아니잖아

정욜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는 가끔 회사에 월차를 내고 광화문으로 향한다. 광화문에서 초국적 제약 회사 로슈를 상대로 하는 대모가 있기 때문이다. 로슈는 에이즈 치료제인 푸제온의 판매 가격이 낮아서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에서의 판매를 거부하고 있다. 욜이 사랑하고 있는 파트너는 HIV감염자, 즉 에이즈 환자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치료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광화문으로 향한다

<
종로의 기적>을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정욜과 그의 파트너 이야기였다. 그 이유는 사회에서 배척받는 게이 집단 내에서 또 다른 형태의 소외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HIV감염자들은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배척당한다고 한다. 영화의 주인공 욜은 감염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파트너가 HIV 감염자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감염 사실과 상관없이 사랑을 고백했다. 영화에서 모자이크 처리가 된 그의 파트너는 욜의 고백이 매우 부담스러웠으며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고 했다.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HIV 감염자는 기피 대상이며 혹시라도 욜이 자신으로 인해 감염된다면.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는 가해자가 되는 것이 두려웠고, 게이 집단에서 완전히 소외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욜의 주변에서도 그의 사랑을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욜은 우리가 24시간 섹스만 하는 건 아니잖아라고 말하면서, 사랑 앞에 질병이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사실 참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병에 걸렸거나 처해 있는 환경이 매우 힘들 때 그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이중으로 소외받는 HIV감염자를 사랑하는 욜의 행동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테지만, 그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들의 사랑이 이성애자들의 사랑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랑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랑으로 인해 살아갈 희망이 생기고,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자 노력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게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같은 남자일 뿐이다.


                                          < 무지개 색깔과 함께 핑크 색 또한 게이를 상징하는 색이라고 한다 >

사람들은 어떤 것을 잘 모를 때 모른다고 하기보다 싫다고 말할 때가 더 많다. 그런 의미로 봤을 때, 이 사회는 그들이 정말 싫은 것이 아니라, 게이의 진짜 삶이 어떤지 몰라 무작정 싫다고 배척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게이들의 삶을 세상에 정면으로 내놓은 <종로의 기적>이라는 영화, 참 반갑다. 영화 속 게이들은 지금까지 봐왔던 우수에 찬 꽃미남은 아니었지만, 딱히 특별할 것도 그렇다고 이상할 것도 없는 보통 남자들이었다. 단지 그들이 보통 남자들보다 멋지게 보였던 이유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편견과 차별에 맞서 세상을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로의 기적>은 일반 게이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결국 게이란 특수 집단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과 같은 사람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To know is To love' 라는 말이 있다. 어떤 것의 실체를 정말로 알게 되면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을 잘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싫어하기만 한다. 게이들에게 등 돌리기 이전에, 많은 이들이 <종로의 기적>을 통해 게이들의 진짜 삶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