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쨍쨍할 듯 하다가도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하늘도 툭하면 날씨 바꾸느라 참 바쁜데, 필자도 개인적인 일로 약 3주간 정말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 세미나 자료를 찾고자 하면 어쩔 수 없이 거쳐갈 수 밖에 없는 포털사이트 첫 페이지의 주요 뉴스들을 한 번씩 체크하고는 했다. 그 중에서 한마디 해야지 하면서 벼르고 별렀던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영국 프리미어리그(프로축구 1부 리그) 선수인 이청용의 부상 소식이었다.

부상 직후 너무 고통스러워서 산소호흡기까지 사용했다는 안타까운 모습.


이청용 부상, 사실상 시즌 아웃

아직 리그 개막전도 하지 않았는데, 시즌 아웃이라는 글이 보였다. 설마 하는 생각에 기사를 클릭해본 결과, 5부 리그 팀과의 평가전 중 톰 밀러라는 선수의 태클에 부상을 당해서 회복에 자그마치 9개월 이상 소요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작년에 세계 최고급 선수들 사이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했고, 그 모습에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했던 필자였기에 실망감은 너무나 컸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민심은 뻔했다. 댓글과 각종 포스팅에는 톰 밀러와 상대팀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 와중에 주목할 만한 포스팅과 오피니언 몇 개를 발견했다. 그로 인해 필자는 또다시 울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 글의 타이틀대로 톰 밀러에게 ‘온정적인’ 내용이었는데 표현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납득할 수 없는 톰 밀러 감싸기

톰 밀러를 비난하지 말자는 온정적인 입장의 기자들 및 블로거들이 있었다. 이들의 입장은 결국 “시합 중 일어난 사고일 뿐인데, 너무 뭐라고 하지 말자”로 요약된다. 그렇다. 분명 사고였을 것이다. 설마 머나먼 이국땅에서 온 한창 잘 나가는 1부 리그 선수를 고의로 해하려고 했을까. 하지만 ‘이청용 부상’이라고 검색만 해봐도 나오는 당시 경기 장면을 놓고 보면, 왜 축구화 발바닥이 보이는 채로 무릎 높이까지 태클이 들어왔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실제로 FIFA(국제축구연맹)에서는 어떤 태클이던지 축구화 밑바닥이 보이게 들어오는 태클에 대해서는 즉시 퇴장까지 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바닥의 스터드 때문에 충돌 시 충격이 몇 배가 되기 때문이다. 톰 밀러의 본심을 따지기 전에, 또는 6경기에서 경고를 3개나 받았을 만큼 과격한 그의 평소 행태를 문제 삼기 전에, 일단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혼날 건 혼나야지

이번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예전에 종종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축구와 농구를 즐기는 학생들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만 되면 운동장이 빼곡히 들어찼던 학창 시절에, 본의 아니게 친구를 다치게 하는 일이 허다했다. 보통 타박상이나 가벼운 상처로 끝났으나, 심하면 골절로 이어지는 일도 태반이었다. 이 때, 잘잘못을 따지는 경우보다 치료비에 대한 보상을 해주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붙을 때가 더 많았다. ‘운동 중에 다친 건데 뭘’, ‘그래도 다치게 한 사람 잘못이지’ 라는 두 가지 생각이 항상 팽팽하게 맞서고는 했다.

발로 하는 축구에서 팔꿈치로 이용한 몸싸움에 가장 능했던 토티. 2002월드컵 16강 전에서 우리나라 김태영 선수의 코뼈를 함몰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번 일을 보았을 때, 톰 밀러도 다치게 한 사람이다. 물론 프로팀 간 경기 중에 상대팀 선수에게 부상을 입힌 것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은 없다. 그 대신에 이렇게 부상을 입힌 선수에 대해서 대중들의 질타가 가해진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악의가 없이 했더라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매너 없는 행동을 통해 상대에게 해를 입혔다면, 당연히 대중들에게 일단은 혼나야 한다. 영국 축구는 원래 과격한 성향이 있다든지, 자신들보다 상위 팀과의 경기를 뛴다는 것에 대한 흥분으로 평정심을 잃었다든지, 오히려 볼터치가 불안정했던 이청용의 업보라든지 등등 톰 밀러를 무조건 옹호하려는 사람들의 이런 주장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니,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보다는 일단은 사태에 대한 객관적인 비난을 가한 후에 해도 늦지 않는 주장들이다.

현대 사회 곳곳에 만연한 온정주의

톰 밀러를 일단 감싸고 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 온정주의의 시발점은 인권에 대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려보면 인권에 대한 관점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범죄관련 문제를 빼놓을 수가 없다. 사형제도, 성폭력자에 대한 화학적 거세 등등..

그 중 사형제도에 대해 살펴보자. 사형제도는 쉽게 말해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고, 재범에 대한 공포심을 제거하는 것이 그 존재 이유이다. 그런데 사형제도 폐지를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결국 인권에 관한 내용이다. 사형 집행에 정말 신중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억울한 누명에 대한 것이다. 죽고 나면 판결이 바뀌어도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과거에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형 폐지론자들은 단지 사형수들도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갇혀서라도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본질이 왜곡된 것이다. 물론 사형제도가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게 한 죄를 지은 것이 너무도 명백한 이들에게까지 왜 온정적인 손길을 뻗어야 하는 건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유영철, 강호순 등등..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이들의 사형집행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인간이길 포기한 이들에게까지 왜 우리의 혈세를 투입해야 하는건가

사회가 따뜻해져야 하는 것은 맞지만..

부모교육에 있어서 이런 말이 있다.
“한 쪽에서는 엄하되, 한 쪽에서는 따뜻하게”
즉, 마땅히 혼낼 것은 혼내고 나서 격려를 받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혼나야 할 것이 뻔한 데도 무조건적으로 괜찮다고 격려만 해주는 것은 이해당사자들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주변 사람들도 불편한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적인 욕이나 비난이 아니라, 잘못한 것에 대해서 반성하게끔 도와주는 비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