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공생(共生) 바람이 불고 있다. 대한민국 자본주의 수호의 1등 공신인 조선일보는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자본주의 4.0’을 내세우며, 자본주의가 진화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 정책을 표방하는 이명박 대통령도 8‧15 경축사에서 "격차를 확대하는 발전이 아니라 격차를 줄이는 발전, 일자리가 늘어나는 성장, 서로를 보살피는 따뜻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며 공생을 강조했다.

물론 공생이니 상생(相生)이니 하는 키워드가 사회의 화두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위의 키워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다만 이번 경우는 특이하다. 이전의 경우, 공생과 같은 가치는 진보의 주장이었다. 정부는 들어주는 시늉만 하고, 기득권 언론은 아예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번 경우, <조선>은 8월 2일 1면 탑기사에 [이젠 ‘자본주의 4.0’ 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개제하고, 이후 정치‧경제‧사회‧사설 등 모든 지면을 동원해 ‘자본주의 4.0’을 홍보하고 있다. 내용도 충격적이다. ‘비정규직의 임금이 올라야 한다, 90%가 패배하는 교육엔 미래가 없다, 고용의무제를 도입해야 한다.’ 등, 평소 <조선>의 논조와는 상당히 다른 기사가 눈에 띈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축사의 경우에도, UFG 훈련으로 인한 북한과의 갈등, 일본과의 독도 문제 등을 제쳐두고 굳이 ‘공생’을 키워드로 삼았다. 마치, ‘공생’이 진보의 요구를 넘어 시대의 요구로까지 발전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 와중에 미국과 한국에서 각각 하나의 뉴스가 들려왔다. 미국의 세계적인 부자 워렌 버핏이 “내 세금을 더 걷으라.” 며 부자감세 정책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선 정몽준 한나라당 전(前) 대표를 주축으로 한 범(凡) 현대가가 5000억원 규모의 사회복지재단을 만들었단다. 정치, 언론의 목소리로 그치지 않고, 바다를 사이에 둔 양국의 거부(巨富)가 직접 ‘공생’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보도는 극명히 엇갈렸다. <조선>은 워렌 버핏의 발언을 16일(화) 사회면3단에 실었다. 그것도 의견을 첨가하지 않은 전형적인 스트레이트 기사였다. <중앙>은 경제면도 사회면도 아닌 세계면에 버핏의 발언을 실었다. <동아>는 한 술 더 떠, 아예 버핏의 발언을 기사로 내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버핏의 발언이 기사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불과 며칠 전에 “지금은 주식을 사야 할 때” 또는 “미국의 신용등급은 언제나 AAA"등의 버핏의 발언이 기사화된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닌 듯하다.

대신 그들은 현대가의 사회복지재단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조선>, <중앙>, <동아> 모두 정치, 경제, 사회면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보도했고 삼사 모두 사설을 통해 이를 칭찬했다. 특히 <중앙>은 사설에서 워렌 버핏의 부자 증세 발언을 현대 재단과 묶어 은근슬쩍 ‘기업 기부 확대’로 물타기 해버린다.

그러나 ‘부자 증세’와 ‘부자 기부’는 다르다. 전자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제도화'라면, 후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사유화'다. 부자 증세가 ‘착한 사회’를 만든다면, 부자 기부는 ‘착한 부자’를 만들 뿐이다. 한국의 기부 문화가 왜곡되어 있고, 기업의 자발적 기부가 정착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부자 증세’가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버핏과 정몽준의 행보를 두고 보여준 언론들의 보도 행태는 유감이다. 버핏의 ‘기부’는 한국에도 필요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부자 증세’는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사설과 칼럼을 이용해 그렇게 주장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광고주가 두려운 것인가, 아니면 부자 증세에 동의하고 나설 국민이 두려운 것인가.

이제 공생은 피할 수 없다. 굳이 <조선>의 ‘자본주의 4.0’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자본주의는 바닥을 드러냈다. 곳곳에서 모순과 붕괴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다만, 공생에도 질(質)이 있다. 세금은 낮춰주고 알아서 환원하라는 것은 저질 공생이다. 질 높은 공생에는 기부 문화도 필요하지만, 부자 증세가 선행되어야 한다. 증세 없는 공생은 공염불이다. 버핏, 그가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