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제 4의 권력으로 불려왔다.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의 3대 권력기구는 분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권력의 균형을 맞춰나간다. 여기에 언론은 제 4의 권력으로서, 3권을 비판, 견제하는 기능을 한다. 국가기관도 아닌 이들이 가진 권력은 엄밀히 말해 권력이라기 보다는 국민들이 거는 기대이다. 이들이 갖는 힘은 여론으로부터 온다. 국민들로써는 쉬이 하지 못하는 일인, 3대기구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다 하기 위해 국민들로부터 위임 받은 힘이다. 하지만, 요즘 몇몇 방송 행태는 언론이 또 하나의 권력으로 군림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권력을 가진 이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구조의 틈새에 편입하여 권력자는 우러러보고 시민 위에는 군림하려 하는 것이다. 카메라에 권력을 입히고, 그 카메라를 시민들에게 들이대는 몇몇 방송의 행태. TV를 돌리다 보면 목격하는 몇몇 장면들에서 카메라의 권력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Scene #1.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데.. 꼭 물어봤어야만 했나요?

 뉴스를 보다 보면, 데자뷰처럼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가족을 잃은 유족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기분이 어떠신지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질문을 받은 유족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오열하고, 카메라는 이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가족을 잃은 자의 슬픔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것이다.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기분이 떠나냐고 묻는다면, 형언할 수 없이 슬프다는 말을 제외하고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카메라를 든 취재진은 뻔한 대답이 나올 것을 알면서 기어코 물어본다.

 취재 대상에게 심리적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굳이 보도하지 않아도 되는 장면을 취재하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언론 취재 제 1의 의의는 ‘알 권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취재진들은 시청자의 알 권리를 위해 이러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것 일까. 취재 대상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시청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하는지 되짚어봐야 할 일일뿐더러, 위와 같은 장면들이 시청자의 알 권리에 포함되는지도 의문이다.

 이들이 취재 대상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촬영을 하는 것은 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을 얻기 위해서이다. 시청자의 흥미를 끌만한 이야기 소재가 된다면, 취재 대상의 상태 따위 고려치 않고 카메라를 들이민다. 사고가 나더라도, 사고의 전후관계를 비롯한 사실을 전달하기 보다는 시청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장면 위주로 촬영이 이뤄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러한 취재진에게, 언론의 윤리보다는, 시청자의 흥미를 끄느냐, 그로 인해 시청률이 몇 퍼센트 나오느냐가 우선이다.



Scene #2. 할머니가 싫다고 하시잖아요, 싫은데 왜 찍나요?



 SBS 순간포착 세상의 이런 일이를 보고 있을 때였다. 방영된 주인공은 화장실에서 주무시는 할머니. 지내실 곳이 없어 차가운 화장실 타일 바닥 위에서 잠을 청하고, 먹을 것이 없어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는 할머님의 모습이 전파를 탔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 모습보다 더 눈길이 가는 것은 할머님을 취재하는 제작진의 태도. 제작진은 화장실 바닥 위에 주무시고 계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몰래 찍으며, 할머니를 놀래 켰다. 당황한 할머님이 제작진을 경계하며 취재를 거부했다. 하지만, 제작진은 카메라를 들이대며 놀란 할머니에게 무차별 질문을 쏟아 부었다. “여기서 왜 지내세요?” “주무실 곳 없으세요?”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제작진의 태도는 보는 이마저 불쾌하게 만들었다.

 상대방이 취재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취재진 자신이 ‘언론사’ 소속이며,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갖는 이상한 우월의식은 그 근원을 찾을 수 없다. 앞서 말한, 시청자의 알 권리를 수행하기 위해 얻은 힘에서 오는 것일까? 할머니의 사연이 시청자의 알 권리에 포함되는지도 의문이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시청자의 알 권리를 제 3자가 오남용하는 것뿐이다. 시청자의 알 권리는 그들이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가 행사할 수 있는 고유의 권리이고, 언론인은 그 것을 용이하게끔 하는 기능을 할 뿐이다. 하지만, 몇몇의 언론인들은 시청자의 알 권리를 자신이 대신 갖는다고 착각하고는, 카메라에 권력을 입힌다.  

 카메라와 마이크에 권력을 대입시키는 순간, 취재 대상은 말 그대로 취재 대상에 불과하게 된다. 당사자의 사생활이나 감정을 인간화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취재의 대상으로 사물화해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방송 영상에서 진정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Scene #3. “폭력성을 알아보기 위해…,” 기자 아저씨가 더 폭력적인걸요!



 “20여명의 학생들이 컴퓨터 게임에 몰입해 있는 또 다른 PC방. 곳곳에 관찰 카메라를 설치한 뒤 게임이 한창 진행중인 컴퓨터의 전원을 순간적으로 모두 꺼봤습니다. “어? 뭐야! 아~씨X!! 이기고 있었는데! 미치겠다.” 순간적인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곳곳에서 욕설과 함께 격한 반응이 터져나옵니다. 폭력 게임의 주인공처럼 난폭하게 변해버린 겁니다.” 

 네티즌이라면 한 번쯤을 들어봄 직한, 지난 2월 13일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이다. 이 뉴스보도는 시청자의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패러디 열풍까지 몰고 왔다. 게임으로 인한 폭력성을 알아보기 위해 기자가 행한 이 실험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실험의 논리성은 그렇다 치고라도, 이 실험을 위해 기자가 임의로 전기 스위치를 내렸다는 발상 자체가 무섭다. 학생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실험에 이용당했으며, 폭력에 물들은 청소년으로 임의 해석되어 전파를 탔다. 학생들의 의사보다는 촬영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기자의 무의식이 불러온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위의 몇 장면들은 방송에서 몇 초 차지하지 않은 적은 비중의 장면이지만, 카메라 뒤에 숨겨진 무의식은 간과해서는 안될 무서운 것이다. 언론이 가진 힘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왜곡된 해석을 등 뒤에 업은 채, 뻔뻔하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몇몇 방송인들의 작태는 가히 폭력이라 할만 하다. 어떤 목적으로 행해지는 방송활동이든, 권력이 대입된 카메라는 폭력의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폭력의 피해자는 취재대상뿐만 아니라, 시청자도 포함되어 있다.

  방송 영상을 담다보면 쉽게 잊혀지기 쉽지만,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 카메라는 권력이 아니다.